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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쌤 류민정 Oct 14. 2024

네 번째 주말,  덕분에 글쟁이로 살고 있어

어릴 때 아빠는 동생과 내가 잠을 안 자고 누워 있으면 우리 방으로 와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대단한 스토리가 있는 건 아니었고, 앞뒤 맥락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이야기는 보통 ‘옛날 옛적에’로 시작됐다.


“옛날 옛날에 토끼 두 마리가 살았대요. 토끼 이름은~ 민순이와 성돌이.”


나와 동생은 아빠가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부터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곤 했다. ‘민순이’는 내 이름, ‘성돌이’는 동생 이름을 변형한 것이었다. 아빠는 이름을 지을 때마다 매번 같은 이름을 말하면서도 항상 뭔가 깊이 생각하는 듯 굴었다. 이미 어떤 이름을 지을지 알고 있음에도 그 순간만큼은 아빠가 어떤 코미디언보다도 웃겼다. 왜 그렇게 웃겼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스마트폰도 게임도 없던 시절이라 그 밤에 우리에게 필요한 도파민은 바로 아빠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어느 날, 민순이와 성돌이는 거북이 한 마리를 보고 풀숲에 숨었어요. 거북이를 놀리려고 몰래 숨은 거예요. 그렇게 조심조심 거북이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갑자기! 민순이가 방귀를 빵! 하고 뀌었대요!”


우리는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이불을 걷어차며 웃음을 터트렸다. 멀리서 엄마가 “얼른 자~!” 하고 소리치면 셋이서 낄낄거리며 눈치를 보다 억지로 잠에 들곤 했다.


내가 12년 동안 아이들과 그림책을 만들며 살아온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아빠가 들려주던 스토리텔링 시간이 분명 그중 하나일 것이다. 개연성도 없고, 의미도 없는 ‘구전 동화’에 가까웠던 그 이야기들이 내 무의식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자라난 나는 초등학생 때 공책 뒷장에 소설을 끄적이는 게 놀이였다. 몇 번의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크고 작은 상을 받은 이후로 나는 이야기 지어내기에 푹 빠져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를 공책에 적고, 친구들이 돌려 읽으면 그다음 이야기를 적어내는, 나름의 수공예 연재 시스템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팬픽’도 물론 써봤다. 팬 사이트에 소설을 올리고 한 자릿수 조회수에도 신나 하며 꾸준히 연재했던 기억이 있다. 상상력에 기대어 글을 썼던 그 시절은 내게 가장 자유롭고 신이 나던 시간이었고, 수려한 문장이나 세련된 글을 배워본 적은 없었지만 살면서 가장 자유롭게, 신이 나서 글을 썼던 때였다.


그리고 그 글쓰기 여정 내내, 나의 곁에는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내가 글 쓰는 모습을 유독 좋아했다. 내가 일기장을 꽉 채워 쓰면 “이건 아무나 못 하는 일이야.”라며 감탄하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덧붙였다. “네 일기로 꼭 책을 내주겠다”고. 나중에 꼭 내 글을 책으로 만들어주겠다는 허풍 섞인 약속. 하지만 그 말이 어린 나에게는 참 설레는 말이었다. 아빠는 백일장에 나를 데려가 주고, 내가 쓴 글을 보며 “이건 1등 할 거다”라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아빠의 지나가는 듯한 말들이 내 글 쓰는 인생을 만들어준 셈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진로를 정해야 할 때, 나는 당연히 글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내 글을 좋아하고, 내 글에 공감해 주고, 나를 응원해 준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내 글을 읽고 그런 감정을 느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막연한 기대감이 나를 문예창작학과로 이끌었다.


그때도 아빠는 내 곁에 있었다. 문예 창작 입시 학원에 다닐 수 있었던 건 아빠의 지원 덕분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고, 내가 다니려던 학원은 학원비는 일반 학원의 1.5배였다. 그뿐만 아니라 지하철로 왕복 3시간이 걸리는 서울에 있었으니 만약 학원에 다닌다면 교통비부터 이런저런 부가 비용이 훨씬 더 들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 학원에 다녀야 글을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글 쓰는 학원을 보내야 할지 말 지로 온 가족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아빠는 직접 그 학원에 다녀왔다. 그리고 고민하던 엄마에게 한마디만 했다. “보내야겠다”. 결국 엄마와 나는 아빠와 함께 학원에 가서 구경하고 등록까지 했다. 여전히 엄마는 불안해했지만, 아빠는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마음먹은 일을 하게 해준 것도 결국은 아빠 덕분이었다.


입시 학원에서는 본격적으로 대학 합격 유형에 맞는 글쓰기를 배우며 백일장에 다녔다. 그때 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으므로 2,000자 내외의 산문을 주로 썼다. 백일장에 나가면 몇 가지 시제를 주고 2~3시간 동안 글을 쓰게 한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 백일장 글에는 늘 감동이 있어야 했다. 환희나 기쁨보다는 쓸쓸함과 비장함, 슬픔이 깔려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때 쓰던 글 안에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죽었다. 할머니와 아빠, 엄마가 번갈아 가면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우스갯소리로 돌아가신 할머니를 몇 번을 더 죽이는 거야, 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원고지 2,000자 안에 담을 수 있는, 그 나이 또래에 전할 수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가족 외에 쉽게 찾기 힘들었다. 난 어떤 시제가 나오든 써먹을 수 있는 소재들을 장전해 놓고 백일장에 가면 단숨에 써 내려갔다. 소재와 어울릴 만한 자료 조사도 필요했기에 다양한 뜻의 히브리어나 순우리말 단어, 염하는 방법, 신문에서 본 특이한 인물 등에 대해 적어둔 온갖 잡지식 노트도 보물처럼 지니고 다녔다. 그렇게 열심히 상장을 모은 끝에 대학에 합격했다. 아빠는 물론 엄마도 가르친 보람을 느끼며 모두 내 글을 응원해 줬다.


대학에 가서 나는 대뜸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학에서는 전공이라는 걸 정해야 하는데, 원고지 2,000자짜리 콩트만 쓰다가 60매가 넘는 단편 소설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막막했기 때문이다. 당장의 목표를 위한 글만 주야장천 썼던 나에게는 그런 지구력이 길러져 있지 않았다. 시를 공부하면 짧은 호흡으로도 완성도를 높이는 연습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시 동아리에 들어갔다. 시는 짧아선지 메시지 전달이 오히려 쉽게 느껴졌다. 소설처럼 오랫동안 독자를 설득할 필요 없이 문장 하나로도 강력한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시어가 주는 매력도 너무 좋았다. 시를 쓰면 내놓기 창피하고 비밀스러운 감정을 멋스럽게 포장할 수 있었고, 내가 쓴 단어들에 스스로 치유하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난 시로 졸업했다. 


그렇지만 시를 통해 누군가를 설득하고 소통한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한때 좋아하는 시와 시인들의 삶을 동경하며 시인이 꿈꿨던 적도 있었지만, 난 그렇게까지 예술가가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내 시가 무척 마음에 드는데 내 시를 읽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렵다고만 하니 흥이 나질 않았다. 애초에 시라는 장르는 가장 고독한 내면의 싸움인데, 순수문학으로써의 시를 쓰기에 난 너무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과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글쓰기는 더 이상 순수한 놀이가 아니었고, 경쟁과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당장의 목표를 위해 글을 썼지만, 점차 그것이 부담스럽고 지쳐갔다.


그런 나에게 변함없이 응원을 보내준 사람은 역시나 아빠였다. 아빠는 글 쓰는 나를 언제나 자랑스러워했다. 어버이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곧잘 아빠에게 글을 선물했다. 편지, 에세이, 시 등 아빠에게 나의 글을 보여주는 건 하나도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빠는 무조건 나의 글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니까.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니까.


매년 숙제처럼 신춘 문예를 내기는 했지만, 번번이 떨어지기만 하는 나에게 아빠는 연말이 다가오면 “이번엔 냈어?” “느낌이 좋은데?”라고 말하곤 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되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면서 왜 그렇게 희망적인 말로 나에게 부담을 주는 걸까! 라는 마음에 “기대하지 마!”라며 괜히 까칠해지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는 깨달았다. 그 믿음이 나를 글을 쓰게 했다는 것을. 아빠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가 내가 다시 글을 쓰게 하는 힘이었다. 신춘 문예에 떨어졌을 때도, 글이 잘 안 풀릴 때도, 아빠에게는 늘 최고의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누구보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아빠였기 때문이다.







[아빠의 에세이 응원글]


나는 여전히 글을 쓴다. 그리고 앞으로도 쓸 것이다. 아빠가 내게 늘 말해준 것처럼, 나는 언젠가 나만의 책을 낼지도 모른다. 그날이 좀 늦게 올지라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무척 소중한 일이다.


 나는 가끔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옛날얘기 또 해줄 수 있어?” 이제는 어린애처럼 이불을 걷어차며 웃을 일은 없지만, 언제나 나를 응원해 준 아빠는 여전히 내 안에서 옛날이야기를 지어내어 주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계속 글을 쓴다. 아빠의 말도 안 되던 이야기처럼, 나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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