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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쌤 류민정 Oct 13. 2024

세 번째 주말, 핵개인 아빠, 샤라웃 드립니다

책 <시대 예보:핵개인의 시대>과 함께

우리 아빠는 취미 부자다. 기타, 해외 펜팔, 사진, 일본어, 영어, 바둑, 마라톤, 라디오 사연 보내기까지. 젊었을 때부터 따져 보면 그 취미의 스펙트럼은 정말로 어마어마하다. 지금 아빠가 태어났다면 아마 진정한 얼리어답터, 아니면 N잡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내 기억에 아빠는 늘 뭔가에 빠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사진이었다. 아빠는 잠깐 사진관을 운영했다고 한다. 하려던 걸까, 잠시 시도해 본 걸까,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와 동생의 어릴 적 사진이 유난히 많다는 게 그 증거가 되어준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필름 카메라로 찍힌 사진들은 커다란 앨범으로 10권이 넘는다. 심지어 연속 사진으로 촬영된 사진도 수두룩하다. 나와 동생이 싸우는 사진, 우리가 울고 있거나 웃긴 사진 등등 찰나를 놓치기 싫어 그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눌러댔을 아빠의 모습이 그려진다. 나중에 들었는데 엄마는 아빠가 그렇게 사진을 찍어대는 통에 우리를 귀찮게 만든다고 잔소리가 심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비싼 현상비 때문에 많이 싸웠다고 했다.


아침 일찍 해가 쨍쨍하기 전 꽃밭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졸린 우리를 깨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데리고 나갔을 때도 엄마는 화를 냈었다. 옷도 제대로 못 입힌 데다 찡찡거리는 애들을 데리고 겨우 나갔는데 현상된 사진을 보면 우리 표정도 아주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진이 몇 장 된다. 심지어 벌을 싫어하는 나에게 꽃에 꼭 들어가서 찍어야 한다고 재촉한 적도 있다. 난 벌레가 무서워서 울어버렸고 그 장면도 사진으로 남았다. ‘그깟 사진 뭐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아빠에게 사진은 취미 이상의 것이다. 가족과 삶을 기록하는 유일한 도구였고 우리는 너무 빨리 자라났으니까 주말마다 사진 찍으러 나가는 일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빠에겐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 중 사진 찍기도 포함되어 있었으리라고 난 믿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카메라를 본 기억은 선명하다. 굉장히 무겁고 조작하기도 힘들어 보였던 카메라, 케이스는 너무 오래되어 가죽이 벗겨져 검은색에서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카메라는 어디로 갔을까?


젊은 시절 아빠는 해외 펜팔도 했다. 어릴 때 아빠가 보여준 펜팔 사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빠의 앨범 뒤쪽에 꽂혀 있던 금발의 낯선 외국 여자. 어린 나이에 그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빠 여자 친구였어?” 외국인 전 여친이라니. 너무 신기했다. 아쉽게도 그 정도는 아니었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해외의 낯선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아빠는 몇 장 안 되는 편지 속에서 외국어로 소통하던 기억을 설레는 표정으로 내게 설명해 줬다. 그 여자분(?)이 아빠에게 무슨 선물을 보냈는데 당시 우리나라도 외국도 우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리 만무했기에 도착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일을 계기로 편지가 툭 툭 끊기는 바람에 서서히 끊겼다고 했다. 잠깐이었지만 아빠가 마치 다른 세상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기억 때문일까. 아빠는 늘 영어와 일본어를 배우고 싶어 했다. 나에게는 함께 지하철을 타서는 플랫폼에 있는 영어와 한자 표지판을 유심히 보라고 조언했다. 한자의 의미를 알면 지역 분위기를 읽을 수도 있고 생활 속에서 새로운 단어나 의미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땐 ‘뭘 그렇게까지 해’라는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그러고 있다. ‘아, 이곳에 달월(月) 자가 들어가서 여기 지역명에 ‘달’이 많이 들어가는구나!’ 뭐 이런 식으로 동네 지역명에 한자를 헤아리고 있다. 난 어쩔 수 없는 아빠 딸이다.


이 외에도 아빠의 취미는 수두룩하다. 바둑은 아직도 우리 집에 놀러 오시는 큰아빠가 (통나무로 만들어진 무거운) 바둑판을 들고 와 둘 정도로 지금까지 아빠 형제가 사랑하는 취미다. 한때는 라디오 사연을 보내거나 퀴즈를 맞혀 상품을 받는 걸 취미로 삼기도 했다. 틈만 나면 서울 산책에 나서는 거나, 맛집 찾아가기, 요리하기…. 취미 하나씩만 해도 일주일이 후딱 지나갈 지경이다.


나는 아빠의 삶이 무척 다채롭고 생동감 넘쳐 보이는데, 아빠는 왠지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는다.


“어긋났어, 어긋나.”


아빠는 가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내가 ‘꿈’이라던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말할 때 이루지 못한 꿈이나 놓쳐버린 기회들이 떠오르는 듯 자주 아쉬운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말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으려 애쓴다.


“그래도 그 덕에 나라는 딸을 얻었잖아.”


그러면 아빠는 머쓱하게 웃으며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다. 무심코 던지는 가벼운 농담 속에서도 나는 아빠의 삶에 녹아 있는 많은 아쉬움들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한다.


아빠는 누구보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람이다. 옛날에 엄마가 점을 보러 다니면 꼭 아빠를 ‘한량’, ‘자연인’이라고 표현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결혼해서 한 가족을 꾸리기보다는 혼자 자유롭게 방랑하는 팔자라고. 난 그 말에 예전엔 100% 찬성했는데 지금은 70% 정도만 동의한다. 아빠에게도 지켜야 할 것들이 많고, 아빠는 그걸 포기하면서까지 한량이 될 만한 매정함이나 결단력은 없다는 걸 이제 알기 때문이다.


최근에 내가 많은 관심을 가졌던 단어 중 하나는 [핵개인]이다.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은 서사입니다. 성장과 좌절이 진실하게 누적된 나의 기록은 유일무이한 나만의 서사입니다.”


데이터 마인드 마이너 송길영의 책 <시대 예보:핵개인의 시대>의 대표적인 문장이자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나의 서사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아빠의 갈래갈래 흩어진 삶의 서사들이 떠올랐다. 책 속에서는 이런 문장도 있다. “희귀함을 추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희귀함이 쌓이면 고유성을 갖습니다.”


핵개인이란 자기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어딘가 소속되어 있더라도 삶의 방식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 자기만의 길을 걷는 사람을 통칭한다. 아빠는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아빠에게서 핵개인의 모습을 보고 익혀 왔다. 아빠는 끝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해 왔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추기보다 자신의 관심사와 열정을 좇았다. 스스로의 삶을 설계하고 선택하는 아빠의 모습은 완벽한 ‘핵개인’이다. 


아빠가 너무 오래전에 태어나 자기만의 길을 어딘가에 축적하거나 서사화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래서 내가 대신 해보려고 에세이를 쓰기로 마음먹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빠는 젊은 시절 기타를 치고, 해외 펜팔을 하며, 사진을 찍고, 외국어를 배우며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 했던 사람이다. 그가 얼마나 많은 꿈을 품었는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그 모든 꿈이 그저 지나가 버린 흔적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사실 수많은 취미 중에서 아빠의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을 가져다준 것은 마라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아빠는 마라톤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술을 끊고 매일 달리며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홀로 참가했다. 42.195km의 풀코스는 물론이고, 산봉우리를 넘나드는 5 산 종주 마라톤까지. 얼마나 많은 곳을 뛰어다녔는지 정확하게 셀 수조차 없다. 누가 권해서도 아니고, 동호회에 속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아빠는 오로지 혼자서 스스로를 넘기 위해 그 길을 달렸다.


아빠는 종종 그때를 회상하며 말한다.


“그때 정말 미쳐 있었지.”


그때의 아빠는 가장 단단하고 강해 보였다. 아빠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며 매번 조금씩 더 자신을 넘어섰으며 마라톤은 아빠에게 단순한 취미 그 이상인 삶 자체였다. 아빠가 자신의 삶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달리면서 되찾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마라톤은 아빠가 세상과 자신을 다시 바라보고, 스스로에게 던졌던 물음인 동시에 대답이었다.

집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아빠의 기록들

지금 아빠는 더 이상 달리지 않는다. 마라톤에서 멀어진 아빠는 조금 아쉬워 보인다. 꼭 마라톤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아빠는 더 이상 달리거나 무언가를 하며 증명하지 않는다. 아빠의 삶을 증명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주말 부녀’다.


나는 한번 아빠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요즘은 왜 마라톤 안 해? 그때 진짜 대박이었는데.”


아빠는 한동안 마라톤 다시 할 거라고 공수표만 던졌는데, 요즘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대답한다.


“이제는 예전만큼은 힘들지.”


그 대답에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빠의 나이를 배제할 수 없어 체력적으로 힘든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어쨌든 여전히 아빠는 우리 가족에서 완벽한 핵개인이기 때문에 그의 목표와 생각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캐묻기는 어렵다. 그저 주말마다 나와 일상을 나누는 순간순간에 집중할 뿐이다.


가끔 생각한다. 아빠가 다시 마라톤을 시작한다면 어떨까? 다시 그 시절처럼 전국을 누비며 새로운 길을 뛰어가는 모습을 보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어긋났다는 생각을 좀 더 덜 하게 되지 않을까? 건강도 건강이지만, 다시 마라톤을 통해 아빠 삶의 서사가 더욱 탄탄해지고 변화하리라는 건 나의 소망이자 바람이다.


달리기는 멈췄지만 아빠는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글쓰기를 다시 결심한 나와 함께하는 주말이라는 시간 속에 있고, 완벽하진 않아도 서로의 보폭을 맞춰가며 지내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서로에게 작은 팬덤이 되어주고, 그 팬덤에 기대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라는 문장을 읽으며, 다시 한번 핵개인 아빠를 떠올린다. 나는 아빠의 팬덤, 아빠는 나의 팬덤. 우리를 표현하는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우리의 주말은 서로에게 팬덤임을 확인하는 시간이고, 가끔 마주치는 술잔은 핵개인으로 살아오고 살아갈 서로를 향한 ‘샤라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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