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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쌤 Feb 12. 2022

이야기가 놀이였던 시절로 돌아가자

조금 창피한 얘기지만, 사실 학부 시절 나의 아동문학 과목 성적은 C+이었다. 아동문학의 기원과 이론적인 내용도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고, 애초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창작 동화를 쓰는 과제를 받고 그 어떤 과제보다 힘들어했던 기억이 난다. 동화는 아이들이 읽는 것이니 예쁜 말, 아기자기한 묘사, 쉬운 어휘, 교훈적인 메시지 등이 담겨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데다, 솔직히 정말 어떻게 써야 되나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처음 글을 쓰는 사람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재밌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면, 그렇게 모호한 묘사로 가득한 이상한 동화를 쓰진 않았을 텐데. 더군다나 나름대로 글 쓰는 데에는 도가 텄다고 착각에 빠져 있을 때쯤이라, 내가 쓴 그 말도 안 되는 동화와 성적은 내게 꽤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그다지 깊은 고민에 빠지진 않았다. 동화는 나랑 맞지 않은 장르구나 싶었을 뿐, 미래의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나의 글쓰기 역사를 살펴보려면 아주 어릴 때로 돌아가야 한다. 초등학생 때는 공책 뒷장에 소설을 끄적이는 게 놀이였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를 적고 친구들이 돌려 읽으면 다음 이야기를 적는 수공예 글쓰기 시스템(?)이었다.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팬픽’도 물론 써봤다. 팬사이트에 소설을 올리고 한 자릿수 조회수에도 신나 하며 나름대로 꾸준히 연재를 해보기도 했고, 학교에서 글짓기 대회가 열리면 존재하지도 않은 인물을 만들어내 마치 내 이야기처럼 적어내 상을 탔다. 수려한 문장이나 세련된 글을 배워본 적은 없었지만 살면서 가장 자유롭게, 신이 나서 글을 썼던 때였다.


진로를 정해야 할 시점이 되자 관심 있고 좋아했던 걸 떠올리니 글 쓰는 일 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공감해주고, 좋아하기까지 하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고, 글 쓰는 과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문예창작학과라는 곳을 알게 된 나는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오직 대학에 가기 위해.


문예창작 입시 학원에 다니면서부터는 합격 유형에 맞는 글쓰기를 배우며 백일장에 다녔다. 소설을 쓰고 싶었으므로 2,000자 내외의 산문을 주로 썼다. 백일장에 나가면 몇 가지 시제를 주고 2~3시간 동안 글을 쓰게 한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 백일장 글에는 늘 감동이 있어야 했다. 환희나 기쁨보다는 쓸쓸함과 비장함, 슬픔이 깔려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때 쓰던 글 안에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죽었다. 우스갯소리로 돌아가신 할머니를 몇 번을 더 죽이는 거야,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원고지 2,000자 안에 담을 수 있는, 그 나이 또래에 전할 수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가족 외에 쉽게 찾기 힘들었다. 난 어떤 시제가 나오든 써먹을 수 있는 소재들을 장전해놓고 백일장에 가면 단숨에 써 내려갔다. 소재와 어울릴 만한 자료 조사도 필요했기에 다양한 뜻의 히브리어나 순우리말 단어, 염하는 방법, 신문에서 본 특이한 인물 등에 대해 적어둔 온갖 잡지식 노트도 보물처럼 지니고 다녔다. 그때 내가 경험한 글쓰기 교육은 목적과 틀에 맞춘 일종의 반복 학습, 암기 훈련이었다.


열심히 상장을 모은 끝에 대학에 합격했다. 그리고 대뜸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학에서는 전공이라는 걸 정해야 하는데, 원고지 2,000자짜리 콩트만 쓰다가 60매가 넘는 단편 소설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막막했기 때문이다. 당장의 목표를 위한 글만 주야장천 썼던 나에게는 그런 지구력이 길러져 있지 않았다. 시를 공부하면 짧은 호흡으로도 완성도를 높이는 연습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시 동아리에 들어갔다. 시는 짧아선지 메시지 전달이 오히려 쉽게 느껴졌다. 소설처럼 오랫동안 독자를 설득시킬 필요 없이 문장 하나로도 강력한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시어가 주는 매력도 너무 좋았다. 시를 쓰면 내놓기 창피하고 비밀스러운 감정을 멋스럽게 포장할 수 있었고, 내가 쓴 단어들에 스스로 치유받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난 시로 졸업을 했다. 그렇지만 시를 통해 누군가를 설득하고 소통한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한때 좋아하는 시와 시인들의 삶을 동경하며 시인이 꿈꿨던 적도 있었지만, 난 그렇게까지 예술가가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내 시가 너무 마음에 드는데 내 시를 읽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렵다고만 하니 흥이 나질 않았다. 애초에 시 라는 장르는 가장 고독한 내면의 싸움인데, 순수문학으로써의 시를 쓰기에 난 너무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내 글의 역사는 ‘놀이‘에서 시작해 ‘훈련’을 지나 ‘자아도취‘로 끝나버렸다.
그리고 돌고 돌아 아이들과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학원에서 합격 전화를 받고 나서 출근 전까지 내내 어리둥절한 상태였던 나는 걱정에 휩싸였다. ‘나 같은 사람이 아이들을 가르쳐도 괜찮은 걸까?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닐까? 괜히 한다고 했나?’ 수만 가지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다행히도 본사 교육을 통해 스토리텔링의 기본에 대해 차근차근 알 수 있었으나 여전히 막막한 마음이었다. 오히려 배울수록 겁이 났다. 아이들을 만나본 적도 별로 없는 내가 1:1로 앉아 순발력 있게 질문을 하고 이야기를 끌어내는 선생님이라니!


이 모든 고민과 막막함을 이겨낼 방법은 의외로 단순한 데서 찾았다. 원래 계시던 선생님이 어떻게 수업을 진행하는지 알려주면서 내가 합격하기 전에도 일하러 온 사람이 있었다고, 인수인계를 받다가 연락 없이 오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이들은 백이면 백 다른 스타일을 가졌고, 그만큼 다 다른 이야기를 만들었으며, 진행 속도도 다 달랐다. 그런데 난 그게 신이 났다.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공짜로 듣다니! 거기에 더해 많은 이야기에 당황해하는 나를 향해 던진 한 마디가 큰 힘이 됐다.


“그냥 들으면 돼요!”


어릴  나는 내가 만든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잠들기  아빠가 해주던 말도  되는 이야기들도 떠올랐다. 가장 기억에 남는  토끼  마리가 거북이를 잡으려고  뒤에 숨었는데  토끼가 방귀를 너무 크게 뀌어 들켜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말도 안 되게 짧고 개연성 없는 이야기들이었는데 그땐 그게 뭐라고 밤새 이불을 차며 낄낄거렸다.


내가 좋아했던 이야기는 그때그때 아무렇게나 지어내버린, 생생한 목소리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 “그런데?”라고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으로 아이들과의 이야기 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글을 놀이로 쓰던 시절로 돌아온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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