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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쌤 Feb 16. 2022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 되자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5~6살부터 초등학생, 중학생까지 다양했다. 어린 아이들 앞에서는 “그래서?” “왜?” “그런데?” 같은 리액션만으로도 수업이 가능했지만, 언제까지나 추임새만 넣으면서 이야기를 만들 순 없는 일이었다. 아이가 원하는 주인공을 정하고, 이야기가 진행되려면 어느 정도 선생님이 방향을 정해줘야 했다.


이를 테면,

“그래서”는 “그래서 누구를 만났어?” 또는 “그래서 어디로 갔어?”로,

“왜?”는 “왜 색깔이 여러 가지일까?” 또는 “왜 귀가 뾰족해?”로

“그런데?”는 “그런데 질투가 나는 친구가 있으면?” 또는 “그런데 누가 뺏어갔대!”


이렇게 구체적인 질문을 만들어 아이가 다음 단계로 상상할 수 있게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 없던 나는 이런 식의 대화법이 영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내용이나 아이의 성격에 맞게 질문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내가 가장 신경 썼던 건 질문의 난이도였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만큼 수업에 집중해줬기 때문에 난 ‘아이의 말‘을 배워야 했다. 나름대로 육아 교육 프로그램도 챙겨보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나 책도 찾아보고, 그들이 이해하는 단어에 대해 공부도 해봤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일상적으로 ‘어른의 말’을 내뱉곤 했다. 아이들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지금 나한테 그런 걸 묻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갸우뚱거릴 때마다 나도 같이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드는 상황이 많았다. 그 결과, 책이 완성될 때쯤 수정할 일이 잦았다. 아주 기본적인 오타부터 시작해서 나이대에 맞지 않는 어휘가 들어간다든가, 이야기가 너무 단순하다든가 갖가지 문제들이 터져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을 시작하고 1~2년 정도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자각하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말은, 아이들과 이야기를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때는 질문보다는 리액션에 가까운 수업이었고 아이 앞에서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지경이었으니,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럼에도 어리숙한 선생님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재미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 아이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게 혼자 고군분투하며 처음부터 슬럼프에 빠진 나는 수동적인 질문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물음표 인간이 되기로 했다. 단순히 질문하는 사람이 아니라 ‘궁금한 사람’이 되기로 한 것이다. 난 내 아이도 없고, 주변에 아이를 만날 기회도 별로 없기 때문에 아이의 말을 배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글로 배운 아이 대화법이나 미디어에 나오는 육아 관련 꿀팁들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를 만나는 내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난 ‘궁금한 사람’이 되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터득해갔다.


만약 좋아하는 동물에 대해 묻는다고 치자. “좋아하는 동물이 뭐니?”라고 물었을 때 선뜻 대답하는 아이들이 절반 정도다. ‘궁금한 사람’ 모드가 되는 건 바로 대답하지 않는 아이 앞에서다. 먼저 동물에 대해서 내가 알아서 확장시켜주는 거다. ”땅에서 사는 동물이 좋아~? 바다에서 사는 동물이 좋아~? 날아다니는 동물이 좋아~?” 이렇게 질문이 길어지면 아이가 조금 당황해하다가 고민을 시작한다. 그럼 다시 질문을 쪼개야 한다.


“귀여운 동물? 힘이 센 동물?”

“털이 긴 게 좋아, 짧은 게 좋아?”

“하얀 거, 알록달록한 거?”

“날아다닐까, 기어 다닐까, 뛸 수 있을까?”

“사람이랑 친할까, 아니면 사람들이 무서워할까?”

.

.

.


이렇게 스무고개식으로 질문하면 정말 나를 싫어하지 않는 이상 아이들은 집중해준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떠오른 답을 ‘조심스럽게’ 말해준다. “와~” “정말~?” “그랬구나~” 하는 리액션은 필수. 스스로 생각하기 싫어했던 아이도 애써 질문을 하는 내가 안쓰러워서라도 귀를 기울여주는 ‘궁금한 사람’ 작전은 대부분 성공이었고, 그렇게 질문은 내 일상이 됐다.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내는 내 마음의 토양이 어떠한지에 따라 채집할 수 있는 말과 피워낼 수 있는 글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위대한 사랑이 대상을 창조하듯이 좋은 인터뷰어도 인터뷰이를 아름답게 창조한다.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중에서)


6년 전부터 학원 일 외에 하는 일이 더 생겼다. 인터뷰를 하고 취재 기사를 쓰는 일이다. 주로 기업 사보나 웹진에 실리는 기사이기 때문에 직장인부터 사회 인사, 유명인까지 정말 각양각색의 인물을 만난다. 인터뷰이가 정해지면 보통은 사전 질문지를 만든다. 기업이나 인터뷰이가 미리 요청하는 경우도 있고, 내가 인터뷰를 가기 전에 따로 만들기도 한다. 이 일 또한 꽤 오래 해왔으니 난 아이부터 어른까지 질문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번 고민한다.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을 많이 읽어야 할까?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할까? 경험을 많이 해야 할까? 모두 맞지만 그동안 수많은 질문지를 작성해오면서 느낀 건, 질문은 상대를 이해하는 만큼 구체적이고, 나 자신을 이해하는 만큼 풍요로워진다. 인터뷰이를 만나기 전 그의 소속과 그동안의 이력, 근황, 성과 등을 숙지하고 인터뷰가 실릴 매체의 성격과 기획 의도를 살핀다. 그리고 나의 관심사와 연결시켜 내 언어로 만들어야 한다. 어차피 내가 쓰는 글은 기획 의도가 확실하고 목적이 있는 글이지만, 인터뷰 현장에서는 나와 인터뷰이가 호흡하기 때문이다. 만약 관심이 없는 분야라고 제삼자의 입장으로 질문지를 작성하면, 인터뷰를 할 때 대화의 흐름을 절대 주도할 수 없다. 질문지에 없는 내용이 나왔을 때 받아치지 못하거나 공감을 하지 못하는 걸 들켜 버벅대는 상황이 반드시 온다.


재밌게도 이건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고 상대에 따라 반응이 다르다. 많은 아이의 성격과 상황을 미리 숙지하지 못하더라도, 아이의 제스처와 몇 마디 말로도 빨리 스타일을 캐치해내지 못하면 말려들기 십상이다. 


지금도 나는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질문하며 살고 있다. 한때 ‘아이들이 만드는 이야기가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맞다. 태어난 지 5년, 10년 남짓된 아이들이 보는 세상은 어쩌면 한정적이기 때문에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 땐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거기서 거기’인 세상을 조금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터뷰이들이 많다. 그런 순간이 느껴질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모른다.


아이들의 머릿속에 숨겨져 있는 생각도 질문을 통해 발견된다.
조금 오래 걸리고, 아직도 어렵고, 헷갈릴 때도 많지만
여전히 난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으로 아이들과 함께 성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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