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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쌤 Feb 10. 2022

미술 학원에 간 방송 작가 꿈나무

2013년 3월. 두 번째 직장에 첫 출근을 했다. 나의 두 번째 직장은 26년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미술 학원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다녔던 미술 학원에서 우수상을 받은 경력 밖에 없는, 문예창작학 전공의 내가 미술 학원에서 일하게 됐다는 말에 가족들은 가장 먼저 ‘뭘 하는 곳이냐’고 물었다.


“책 만드는 곳이야.”


어리둥절한 반응이 당연했다. 미술 학원이라더니 책을 만든다고 하고, 책을 만들기는 하는데 글을 쓰는 곳도 아니니까. 어렇게 대답해도 설명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친구들 또한 ‘미술 학원인데 책을 만들고 글 전공 선생님인데 논술이 아니라 미술 학원이라고?’ 되물었다. 아직까지도 내가 하는 일이 뭔지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구구절절 설명을 해줘야 하니 당시에는 그럴 만도 했다.


대학 졸업 후, 나는 토익 점수가 모자라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채 선배의 권유로 방송 작가가 됐다. 문예창작학과를 간 이유 중 하나가 인간극장 같은 사람 냄새 가득 담긴 다큐를 만드는 방송 작가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나름대로 꿈을 이룬 셈이었다. 하지만 현실을 깨닫는 데는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막내 작가는 출근이 있되 퇴근은 없었다. 하루 종일 앉아 PD들이 촬영해온 영상을 초 단위로 쪼개 화면과 내용을 옮겨 적는 프리뷰 작업을 했다. A4 50~100페이지가 훌쩍 넘어가는 프리뷰 파일이 다큐 한 편당 적게는 6개, 많으면 20개가 넘었다. 뭐 그 정도 중노동은 막내니까 충분히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스케줄에, 스트레스를 술로 푸느라 매일 회식이 이어지는 노동 환경 속에서 일상을 지속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일하면서 공짜로 술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적응력 만렙으로 열심히 다녔지만, 하루이틀이었다.


방송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배우는 시간보다 술먹고 일하는 노하우를 구체적으로 터득하며 1년이 흐르자, 말 그대로 ‘이게 사는 건가’ 싶었다. 그즈음 메인 작가 언니가 아침 방송을 제작하는 회사에 ‘입봉’을 시켜 줬다. 그곳에서 마주한 현실은 더 우울했다. 일을 가르쳐 주어야 할 선배 작가는 재택 근무여서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었고, 대표는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나에게 모든 이슈를 떠넘기기 일쑤였다. 불안함도 내 몫, 책임도 내 몫이었던 생활 속에서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고 고민 끝에 퇴사를 결심했다. 아예 방송 작가를 그만 두기로 했다. 출근 마지막 날, 대표는 회사로 술집 여자를 데리고 들어갔고 사람 냄새 나는 다큐의 꿈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는 방송 일을 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취업 사이트을 돌아 다니던 중 한 출판사를 발견했다. 아니, 출판사로 보이는 곳을 발견했다. 분명 ‘책’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데 아동, 선생님 이라는 키워드가 함께 있었다. 취업이 급했던 난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아~ 아동책을 만드는 회사구나’. 난 아이들을 만나본 적도 없고, 살갑게 대하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직접 만나는 것만 아니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이력서를 넣었고 면접을 보러 오라는 말에 기대에 부풀었다. ‘나도 이제 어엿한 출판사 직원이 될 수 있겠군!’


생전 처음 가는 역에 내려 택시를 잡아 탄 뒤, 낯선 건물의 계단을 올라 입구로 향하면서 들리던 아이들의 목소리를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입구에 들어설 때만 해도 내가 일할 곳이 출판사라고 확신했던 나는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와 시끌벅적한 아이들을 보며 정신이 혼미했다. 지금도 그 풍경이 슬로우 모션처럼 그려진다.

‘잘못 왔나?’

그리고 정말 어이없게도 면접을 보면서 그곳의 정체를 알게 됐다. 그곳은 내가 아니라, 아이들이 책을 만드는 곳이었다. 아뿔싸. 미술 교육과 스토리텔링 수업을 통해 출판이 되는 곳이니까 출판사가 아예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그곳은 미술 학원이었다. 어리둥절한 채 이것저것 대답을 해낸 나는 용케도 면접을 통과했다.


그렇게 난 거의 10년 가까이 아이들과 만나오며 그림책을 만들고 있다. 앞서 내 이력을 구구절절 읊은 것은 정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아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내가 왜 미술 학원에 오게 됐는지, 그 요상한 흐름(?)을 돌아보고 싶기도 했다.


1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으니 수많은 희로애락이 있었다. 내가 미술 선생님인지 이야기 선생님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슬럼프가 오기도 했고, 중간에 새 삶을 찾겠다며 퇴사하고 나갔다가 일주일 동안 6키로가 빠지는 고통을 겪고 돌아오기도 했다. 내가 이 직업에 고민할 때마다 계속 다닐 명분과 즐거움이 생겼다. ‘천직이야, 못 그만둬~’ 라고 말했던 어떤 점쟁이의 말이 사실이었다. 특히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에 대해 잘 몰랐기에 더 새롭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기도 하다. 상대방이 아이일 뿐,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을 그려내도록 하는 일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니까 말이다.


아이들은 단순하다.
토끼가 딸기를 먹으면 빨갛게 변한다고 하고,
무지개가 뜬 채로 비가 오면 무지개 비가 내린다고 한다.
호랑이의 줄무늬는 고양이가 싸우다 낸 상처라고도 한다.
그렇게 단순하다가, 때로는 기가 막힌 상상 속으로 나를 데려간다.
바닷속에서 목걸이를 만드는 고래를 소개해주고,
나뭇잎으로 다리를 만들어 이사를 다니는 꽃에 대해 알려준다.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조금도 같은 것이 없었고,
아이들의 말속에서는 불가능이란 없었다.
이쯤 되니 기록을 하고 싶어졌다.
아이들의 이야기들, 그리고 그곳에서 피어난 나의 단어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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