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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쌤 Mar 26. 2022

마음을 찾아주는 사람이 되자

아이들의 ‘마음의 처음’ 찾아주기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매년 ‘동시 암송 대회’ 라는 걸 열었다. 다른 학교는 어땠는지 몰라도, 내가 다니는 학교에선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A2 사이즈의 큰 종이에 빼곡히 적힌 동시를 나눠주고는 외우는 숫자만큼 등수를 매겨 상장을 나눠줬다. 난 꽤 모범적인 학생인 편이었기 때문에 상장도 꽤나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기억에 나는 동시는 '없다'. 짧게는 4줄에서 길게는 4연이 넘어가는 동시들을 달달 외워 선생님 앞에서 발표하는 행위가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다. 동시라고 해서 아이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작자 미상이거나 출처가 불분명한 시들도 많았던 것 같은데 왜 그런 대회를 열었을까. 무조건 외운다고 감성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한창 교육 과정이 바뀌고 EQ 발달에 혈안이 되었던 때라서 그랬을지, 그냥 학교 지침이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식으로 동시를 접한 나에게 동시란 쉬운 단어와 반복된 운율이 특징인 ‘아이들이 읽어야 하는 시’ 정도로 기억되어 있다.


이야기 그림책을 한번 만들어 본 아이들이나 그림을 다양하게 그려보고 싶은 아이들은 동시집을 만든다. 시를 전공한 나는 동시 정도야 거뜬히 가르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큰 오산이었다. 아이들에게 동시를 써보자고 했을 때는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 번째는 거부다. 아예 싫다거나 혹은 재미없다는 반응. 두 번째는 자신 있게 시를 써내려 간다. 하지만 결과물은 어디서 본 듯한 단어와 반복되는 어구, 예쁜 말로 가득 채운 글이 다반사다.


난 시를 완성하는 것 이전에 아이들의 생각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시를 쓰게 할까?’ 보다는 ‘어떻게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도록 할까?’로 질문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한때 동양철학에 심취해 당대 유명했던 동양 문인들의 글에 빠져 있던 적이 있다. 그때 알게 된 이탁오라는 문인이 쓴 글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아이는 사람의 처음이요, 동심은 마음의 처음이다.”


난 동심을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한 말을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마음의 처음이라니. 동시집을 만들 때마다 난 이 문장을 잊지 않으려고 되새기곤 한다. 아이들에게 시의 형태나 잘 갖춘 문장을 알려주기보다는 우선 ‘마음의 처음’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시를 쓰기 위해 빈 종이를 가져다줬을 때 아이들은 당연히 뭘 써야 할지 모른다. 어른들도 종이와 펜만 주고 시를 써보라고 한다면 백이면 백 막막해할 텐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마음의 처음을 이끌어내기 위한 내 방법은 아이와 종이를 그대로 던져두는 것이다. 우선, “동시에 정해진 것은 없다”라고 안심시킨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너만의 생각을 적으라고 말해준다. 초콜릿이 달콤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초콜릿의 입장이 되어보거나, 초콜릿을 먹는 기분을 천천히 서술해 보라거나, 초콜릿이 따갑다고 해보라거나, 하는 식이다. 짧아도 되고 길어도 되고, 모든 게 마음대로 가능하지만 단지 너만 할 수 있는 생각을 마음껏 적어보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그 어려운 과정을 너무나 쉽게 해낸다. 아무리 학원을 많이 다니고 유튜브나 SNS에 노출된 ‘요즘 아이들’이라고 한들, 동심, 마음의 처음은 누구에게나 그대로 남아있다는 걸 동시를 쓸 때마다 느낀다.


동시의 기준이 무엇인지 내가 정할 순 없다. 하지만 동시는 아이의 생각을 끌어내는 좀 더 내밀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시를 소개해보자면, 가을에 관한 시다. 아이가 처음 쓴 시는 이렇다.


가을은 언제나 성격이 급하다
모든 것을 빨리 끝내려고 하고
예쁜 꽃잎을 떨어트리고 초록 나뭇잎을
갈색으로 물들여 떨어트린다
빨강색도 된다 나는 가을이
좋긴 하지만 예쁜 꽃을 지게 만들어서 좋지 않다


아주 좋은 발상이지만, 글이 정돈되지 않았고 마무리가 되지 않은 느낌이다. 난 ‘가을이 변신하는 건 좋고 잎이 지는 건 좋지 않다’는 메시지에 집중해서 아이와 생각을 정리했다.


Q. 잎이 지는 거랑 아쉬운 마음은 어떻게 닮았을까?
A. 떨어진다

Q. 빨리 떨어질까? 느리게 떨어질까?
A. 천천히

Q. 가을 잎들은 알록달록한데 좋지 않은 마음은 무슨 색일까?
A. 하얀색


그리고 완성시킨 시.


가을은 언제나 성격이 급하다
모든 것을 빨리 끝내려고 한다
예쁜 꽃잎을 떨어트리고
초록 나뭇잎을 갈색으로 물들여 떨어트린다
조급한 가을 때문에
잎들은
빨강색으로
주황색으로
노랑색으로
변신한다

가을의 변신이 좋긴 하지만
지는 잎들을 보면
내 마음도 하얗게 천천히 떨어진다

 

이렇듯 ‘좋지 않다’는 표현을 ‘내 마음도 하얗게 천천히 떨어진다’ 라는 문장으로 바꾸기까지 마음을 들여다보는 다양한 질문들이 필요하다. 아이는 이 시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시적으로 생각하는지’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후에 쓴 시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자유롭게 펼쳤다. 애초에 상상력이 풍부하고 발상이 특이한 아이라 할지라도 난 이렇게 아이의 시가 변신하는 과정을 보면 굉장히 기쁘고 벅차오른다.


그동안 내게 없는 시선, 발상, 표현력을 가진 아이들의 수많은 동시들이 책으로 나왔다. 그 과정을 다듬어주고 북돋아주며 마음의 처음을 발견해주는 게 나의 일이다. 어떨 땐 ‘이렇게 가르쳐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아이에게 모든 걸 기댄 채 수업이 진행되기도 하지만, “사람의 처음”을 훌쩍 지나온 나는 아이들의 마음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 최대한 그곳에 가까이 가도록 손가락질을 해줄 뿐, “마음의 처음”을 발견하는 건 아이들이 직접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문장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아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그려진다. 그래서 난 동시집을 만드는 일이 즐겁다. 아무도 모르는 마음들 깊은 곳에 가 닿아 마음의 주인도 몰랐던 처음을 발견하는 기분, 진짜 동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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