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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쌤 Mar 26. 2022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자

호랑이가 될 것인가, 선생님이 될 것인가

우리 엄마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다. 자주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정말 혼을 잘 냈다. 엄마의 기준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 나는 말 그대로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다. 엄마의 얼굴이 무서운 것도 아니고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나는 맞은 적도 없다. 화난 엄마는 평소보다 더 부드럽지만 낮은 목소리로 조목조목 내 잘못을 따져 물었다. 왜 그러면 안 되는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 뼈를 때리는 논리로 나를 누른 것이다. 난 그런 상황 자체가 무서워서 늘 닭 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곤 했다.


난 엄마와 반대였다. 20대까지만 해도 화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엄마만큼 무섭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애초에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불합리한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에 거부감까지 있던 터라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는 건 내게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여러 경험을 통해 지금은 어느 정도 내 나름대로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을 찾긴 했지만, 이전까지는 물러 터진 구석이 많은 편이었다.




선생님의 위치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이들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화내는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화가 날 때 어떻게 화를 내야 하는지가 고민이었다. 친절하게 대하는 건 쉽다.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차근차근 이야기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진도를 나가는 것 또한 선생님으로서 당연한 일이기에 생각한 대로 실행하기만 하면 됐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훈육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난 조금 늦게 알았다. 아이가 버릇없이 굴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는 정작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난 언제 화가 나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수업을 진행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내 선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일 때마다 더 무서운 선생님에게 데려가거나, 원장님을 부르는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동료 선생님에게 들은 훈육 팁을 떠올려보기도 했지만 진짜 화를 내야 할 순간에는 머릿속이 하얘지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나를 진심으로 화나게 한 아이가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정도 되었던가, 어느 날 질문을 건네는 나에게 아이는 대뜸 “근데요?”라고 되물었다. 처음에는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을 잃었다. 나름대로 침착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려고 했지만, 아이는 멈추지 않고 되물었다. “그래서요?” “모르겠는데요?” “왜요?” 조롱 섞인 말투로 말대답을 이어가던 아이는 이런 식으로 하면 책을 만들 수 없다는 내 말에 “맘대로 해요~”라는 말로 쐐기를 박았다. 작정하고 나를 약 올리려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주변 환경이나 새로운 사람에 대한 적응력도 빠르지만 경계심도 많으므로 때때로 ‘간은 본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예의 있고, 처음부터 수업을 재미있게 잘 따라와 주지만 이런 경우에는 어느 정도의 엄격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느낀 분노가 너무 컸다. ‘어떻게 선생님에게 그럴 수가 있지?’라는 생각부터 날 무시하고 있다는 자격지심까지 느껴지며 ‘너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굉장히 순수한 화였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난 선생님이고, 그 아이는 교육 서비스를 받기 위해 내 앞에 앉아 있는 학생이다. 나를 이렇게까지 약 올려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건가 싶어 이래저래 이해해보려고도 했으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화가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가 한 일은 조금 어색하지만 최대한 단호한 어조를 유지하며, 내 생각을 잘 말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나도 화내면 기분이 좋지 않아.

네가 어떻게 말하든 나는 널 가르쳐야 하고 그때까지 이 시간은 안 끝나.”


나는 어차피 화를 내는 법을 모르고, 무섭지도 않은 사람이니까 그냥 솔직하게 내 상황을 말하자는 심산이었다. 조금 뻔하기는 해도 이 말들은 나름 먹혀 들어갔다. 아이는 쿨한 말투로 “네~ 네~” 하며 대답하더니 더 이상 말꼬리를 잡지 않고 수업을 마쳤다. 


이후 시간이 흘러 내게 말대답을 하며 비협조적이던 그 아이는 언제 그랬었냐는 듯 친근하게 내게 다가왔다. 아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떠본 것일 수도 있고, 그냥 기분이 안 좋았을 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간에 난 거의 처음으로 아이에게 단호하고 엄격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조금은 단호해지는 법을 터득했지만, 정말 화가 날 때 그때의 방법을 쓰곤 한다. “누구야, 내가 지금 너한테 화를 내는 건 나도 힘들어.” 라거나, “너한테 화내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동안 수많은 아이들을 만나면서 수도 없이 화가 나는 상황을 마주해온 내가 느낀 건, 아이들은 생각보다 더 영악하고, 그래서 생각보다 어른의 말을 잘 이해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정말 심각한 상황도 있다. ‘선생님은 내가 싫다고 하면 바꿀 수 있다’면서 갑질하는 아이, 보란 듯이 가위로 제 앞머리를 잘라버리는 아이, 교실을 돌아다니면서 난동을 부리는 아이 등... 이런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는 부모가 아닌 이상 훈육은 불가능하다. 이런 예외 상황을 제외하고 아이들은 정확하고 솔직한 대화 속에서 성장한다.




나는 아이를 생각할 때 사랑스러운, 조심스러운, 아껴줘야 한다는 감정보다는 ‘작은 인간‘이라는 인식이 강한 편이다. 아이는 아직 성인으로 성장하지 않은 존재일 뿐이고 일방적으로 기분을 맞춰줘야 하는 갓난아기가 아니다. 경험이 적고 배워야 할 것은 더 많지만 아이라고 무조건 감싸 안아주는 것만이 좋은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이들의 솔직한 생각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말이다.


내 생각은 육아 팁이 아니고, 문제아 훈육 방법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지만 아이 앞에서 호랑이가 되어야 할 때가 온다면, 진짜 호랑이가 되어 할퀴기보다는 선생님의 쪽에 서서 아이를 인간 대 인간으로 바라보는 게 낫지 않나 싶다. 나도 여전히 호랑이 쪽으로 마음이 기울 때가 많지만, 그때마다 떠올리려 노력한다.


아이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서고,
아이들은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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