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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쌤 Mar 01. 2022

아이들의 입말을 믿어보자

입말 속에서 발견하는 이야기들

아이들이 이야기를 만들기 싫을 때 많이 하는 말은 두 가지다.


“모르겠어요”

“생각이 안 나요”


이런 저런 방법을 써도 되지 않을 때 나는 마지막 카드로 아이들의 ‘솔직함’에 기대본다. 그냥 마구잡이식으로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다. 특히 10살이 넘어가면 아이들은 생각이 보다 분명해지기 때문에 일상적인 대화속에서 이야기가 탄생하는 경우가 많다.


한 12살 남학생은 억지로 엄마에게 이끌려 학원에 와서 이야기에 흥미를 못 붙이고 있었다. 고학년에 가까울수록 상상하고 표현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완강히 거부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적극적인 의지도 없었다. 이런 아이야말로 가장 까다로운 케이스다.


그래서 난 그냥 대화를 했다. 요즘 유행은 뭔지,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은 언젠지, 그냥 상담하듯 대화를 이어가던 중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엄마로 끝난다는 것이다. 엄마에 대해서 계속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는 “엄마가 엄청 친절해보여도 엄청 무섭다며” 흥분했다. 그전까지는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하던 아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12살 남학생에게 가장 큰 화두는 ‘엄마’였던 것이다.


“엄마는 맨날 화만 내요. 완전 용이 불 뿜는 것처럼!

아마 엄청 큰 건물도 부술걸요?

그리고 엄마가 화를 안 낼 것 같아서 딴 짓을 하면

백퍼 들켜서 혼나요. 아, 진짜!”


그 아이가 이렇게 자세한 묘사와 실감 나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어 나는 신이 났다. 그래서 왜 엄마에게 혼나는지, 언제 가장 많이 혼나는지를 물었더니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그리고 아이는 ‘화가 난 엄마에게 살아남는 방법’을 주제로 책으로 만들었다.


1. 할 일을 똑바로 하기

2. 눈치보지 않기

3. 엄마에게 선물 주기

4. 혼나고 있을 때 딴 생각 해보기

등등


당연하고 현실적인 방법부터 실제로는 절대 해보지 못할 우스운 방법까지, 어쩌면 엄마에게 혼나본 대부분의 아이들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어냈다. 이건 내가 오로지 대화로만 이뤄낸 최초의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도 자주 쓰는 방법인데 난 글 소재가 생각이 안 난다는 아이들에게는 생각이 없다는 걸로 이야기를 해보라고 권한다. “더 생각해서 뭐해?” 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잠시 당황해하면서 그 말을 곧잘 실천한다.


글쓰기를 거부하다 급기야 뇌가 비어버렸다며 칭얼거리던 아이는 뇌에게 ‘제발 생각 좀 해달라’고 편지를 썼고, 생각이 아예 없다며 버티던 아이는 ‘머릿속에 있는 또 다른 내가 생각을 다 먹고 있는 것 같다’는 시를 적었다.


아이들은 필터를 거치지 않고 생각을 떠올리기 때문에 오히려 그걸 에너지 삼아 ‘생각이 없는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에도 교육의 정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수준에 맞게 머릿속을 밝혀줄 커리큘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그때그때 뿜어내는 말들 속에서 이야기를 발견해주는 것이야말로 ‘스토리’의 본질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재현되는 이야기들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 동화에서 시작했으니까.


아이들의 입말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오르고,
솔직함으로 무장한 그 유쾌한 이야기 속에는
상상 이상의 가능성들이 펼쳐져 있다는 걸,
오늘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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