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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쌤 Dec 06. 2022

책장 속 나의 교과서, 나의 글 선생님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대학교 때 인문학 세미나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드나들던 홈페이지에 연재되던 시리즈가 있었다. 코너 이름은 ‘올드걸의 시집’이었고, 연재하는 사람의 이름은 ‘은유’였다. 등단한 작가도 아니고, 저서도 알 수 없는 ‘닉네임’만 알고 있는 이의 글이었지만 글마다 문장마다 마음을 때리는 기분이었다. 시 한 편과 짧은 에세이를 함께 읽고 나면 때론 뭉클하고 때론 고양되며 글의 힘을 한껏 느낄 수가 있었다. 저절로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올라오던 글들이 어찌나 기다려졌는지 모른다.


처음엔 질투도 났고 부러움이 되면서 나중엔 존경심이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궁금했는데 글쓰기 세미나를 운영하는 ‘학인’ 중 한 명이었다. 나도 그가 만든 세미나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문예창작학과 학생의 신분으로(?) 글쓰기 세미나에 참여한다는 게 조금 부끄러운 기분도 들어서 매번 세미나 안내 게시물의 조회수만 올리다 말았다.


그러다 당시 세미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냉큼 사서 읽었다. 읽은 당시에는 큰 감흥이 없었는데, 1년 뒤 프리랜서 일을 시작한 이후에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발견해서 정독하게 됐다. 그리고 이 책은 나에게 교과서가 됐다. 조금 다른 글쓰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는 선생님처럼 찾게 된다. 사실 책 속 모든 부분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글쓰기’를 대하는 자세나 프리랜서 작가로 살아가는 데에 가져야 할 태도에 관해서 만큼은 책 전체에 온톤 밑줄을 긋는다.


대학 시절부터 난 ‘글은 인격’이라는 말을 믿어왔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문장력, 글의 퀄리티와 비례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은유 작가는 그것을 실현한 거의 유일한 작가다. 100%의 은유를 아는 것은 아니더라도 나는 그의 글을 통해 삶의 폭넓은 이해를 느낀다. 또, 작가의 자세와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감각을 배운다. 날카로운 시선과 날 선 감각으로 세상을 깊게 사유하고 있지만 문장 사이마다 따듯함으로 가득 채우며 폭신한 글을 쓰는 재주는 읽을 때마다 너무 너무 부럽다!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메멘토, 2015

글을 쓰고 싶은 것과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을 즐기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진리탐구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발견하기 위한 별도의 방법이 필요하지 않으며, 두 번째 방법의 탐구를 위해 세 번째 방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런 인식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금속 연마를 예로 든다. 금속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모루가 필요하고 모루를 갖기 위해서는 다른 도구들이 필요하다. 그런 식으로 계속 제2, 제3의 도구를 찾으며 무능력을 증명하는 일의 어리석음을 비판한다. 일단 내 앞에 있는 조잡한 도구로 시작하라. 망치로 삽을 만들면 삽으로 사과나무를 심고 사과 열매를 팔면 책을 살 수 있다. 시작을 해야 능력의 확장이 일어난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 문장력이 탁월한 사람, 감각이 섬세한 사람, 지구력이 강한 사람 등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운이 빠진다. 이미 훌륭한 글이 넘치므로 나는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내 삶과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나의 절실함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나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 기운이 난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다.

나의 삶을 숙고하고 나의 경험을 나의 언어로 말하는 훈련을 반복하기 전에는 ‘글재주’와 ‘고유성’은 드러나지 않고 그러날 수도 없다.

중언부언 수식 과잉의 문장이 아니라 군더더기 없이 정교한 문장이 좋은 문장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나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내가 쓴 글이 추상적인지 구체적인지, 잔뜩 멋 부렸는지 진실한지는 바로 알기 힘들고 남이 쓴 글과 내가 쓴 글을 읽으면서 감각으로 익힐 수 있다.

나보다 더 잘 쓸 수도 없고 못 쓸 수도 없다는 말을 희망적이다. 적어도 뿌린 대로 거둘 수 있다는 게 아닌가. 살아가면서 투입 대비 산출이 정확한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 길러졌다. 한 존재를 바라보는 ‘겹의 눈’이 생기는 것이다. 인간은 서로의 도움 없이 삶을 지탱할 수 없으며 정신을 배양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터뷰 경험은 소중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인생의 스승으로 보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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