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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쌤 Dec 07. 2022

엄마의 아픔은 멀고도 가까웠다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반비, 2016


나의 엄마는 내가 스무 살 때부터 서른셋까지, 13년 동안 신부전증으로 투병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난 나의 20대와 30대 초반을 아픈 엄마와 함께 지냈다. 놀기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내가 매일 엄마 곁을 지키며 돌본 건 아니었지만, 나의 내면에는 늘 아픈 엄마가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3년이 지난 지금도 난 집을 떠나 멀리 여행지에 가 있을 때마다 ‘무언가 두고 온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난 이것이 아픈 엄마를 두고 놀러 다니던 13년이 남긴 트라우마라고 생각한다.


난 항상 엄마의 아픔을 헤아려보며 죄책감 같은 것에 시달렸다.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어렸고, 나 또한 그 아픔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죄책감이었다. 그리고 절대 그전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후회 때문이었다. 후회를 덮어보려고 나는 엄마와 함께 아프기로 결심한 뒤 최대한 많은 시간을 엄마와 보냈다.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아픔을 나눌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어렴풋이라도 엄마가 혼자가 아닌 것에 안도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 홀로 첫 수술을 해야 했던 엄마에게 손톱만큼이나마 위로를 하고 있다는 마음에 안도했다. 나는 가늠할 수 없는 고통 사이사이마다 잠깐씩 미소를 띨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도 느꼈다.


그러나 내내 “나는 늘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불안한 마음으로, 다음 위기를 기다렸다”. 간병이라는 건 그랬다. 일상은 결코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으며 마음을 하나로 다잡을 수조차 없다. 안정감이라는 건 느낄 새가 없다.


리베카 솔닛은 많은 문장력 있는 작가들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지만, <멀고도 가까운>은 그녀가 어머니를 돌보며 쓴 글이라는 말에 더욱 연대감을 느끼며 읽었다. 글쓰기나 문학에 관한 이야기도 많지만 책을 관통하고 있는 분위기는 ‘간병하는 이의 우울감’이 깔려 있고, 나는 그것에 크게 공감했다. 특히 어머니의 불행에 관한 통찰과 고독을 갈망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해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까지… 난 이 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엄마가 떠나고 난 지금,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삼켜야 할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와 나누던 대화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아픔을 나누는 건 실패했지만 엄마와 나는 대화를 나누고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문득 머릿속에 엄마에게 할 말이 생각나고 ‘아, 맞다’ 하고 멍해지곤 한다.


가까운 사람을 일찍 떠나보낼 준비를 하거나 이미 떠나보낸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고독을 안다. 고독은 낭만도 아니고 우울도 아닌 뿌리 깊은 존재의 이유라서 존재를 잃어본 사람만이 아득하게 느껴볼  있다.  엄마를 통해 고독을 배웠고, 고독을 통해 “멀고도 가까웠던엄마를 기억하는 중이다. 그리고 리베카 솔닛은 고독의 메시지를 정말 세련되게 적는 사람이다.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노인을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낭만적 사랑이나 아이를 낳는 일 같은 다른 종류의 헌신에 비해, 조언이나 독려가 될 만한 분량의 글이 없다. 그 일은 마치 예정에 없던 어떤 일처럼 슬그머니, 마치 한 번도 경고를 받지 못했고 지도에도 없던 암반으로 가득한 해변처럼, 갑자기 당신 앞에 닥친다.

어머니의 불행은 내가 끌고 가야 할 썰매 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어머니를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해, 그 썰매를 곰곰이 살폈다.

어머니가 행복했는가 아니면 불행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다른 사람들은 아주 잘 다듬어진, 꽃들이 만개한 평원에서 어머니를 만났던 반면, 나는 어머니의 불행이라는 진짜 늪에 머물렀던 것이라 생각한다. 어머니의 정신이라는 풍경의 또 다른 부분에 아주 멀찍이 자리 잡고 있던, 어머니 본인도 애써 알려 하지 않던 그 불행의 늪에 말이다.

가능한 한 멀리 가고 싶었고, 일단 그곳에 도착하고 나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철저히 혼자임을 깨달았다.

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속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나 자신의 이야기는 이제 내게 딱히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저런 사건들은 먼지가 되어 버렸고, 그 먼지가 쌓인 곳에서 풀이 몇 포기 자랐다. 그 풀에서 피어난 꽃 무더기, 어쩌면 그 향기만이 허공에 떠다닐 뿐이지만, 거기서 생겨난 질문 혹은 생각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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