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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ul woon Sep 18. 2015

선생님, 잘 지내시죠?

이젠 제가 안아 드리고 싶어요


제겐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세 분 계십니다.

중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 3학년 담임 선생님,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


현재 안부전화드리며 지내는 분들은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 두 분이 시며, 중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연락이 끊어진 중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과는 현재까지 연락이 닿지 않고 있습니다.


연락드리지 못한다는 것이 죄송스러워 그랬을까요?

목소리 큰 말썽꾸러기로 선생님을 피곤하게 해 드렸던 기억에 추억이 더욱 아련한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지금 돌이켜보면 뭐가 그리도 즐거웠던지 하루하루가 달랐고 항상 흥미로웠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수업시간은 몰래 떠드는 맛이 있어 좋았고 쉬는 시간은 복도를 누비며 친구들과 떠들어 대는 맛에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우리 반이었다면 모두가 기억할만한 특별한 경험이 있는데 말썽꾸러기들의 집결지였던 2학년 3반의 조회, 종례시간은 항상 담임 선생님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음악 선생님이셨던 선생님은 항시 떠들어대던 우리 반 아이들에게 ‘조용해라.’라는 말이 효력 없다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고 저희의 마음을 다른 방법으로 집중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때, 그 어린 나이에도 ‘우리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과는 많이 다르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더불어 선생님의 그 아름다운 감성은 사춘기가 시작된 아이들에게 큰 쓰다듬의 손길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수업 중에 하시는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린다.’는 선생님들의 말씀은 너무나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담임 선생님께 듣게 될 꾸지람이 무서워가 아닌 선생님께 실망을 드리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학교의 최고학년이 되었을 때도 2학년 3반, 우리 반이었던 아이들은 지나가시는 선생님이 눈에 띄실 때면, 복도에 흩어져 3학년 반 친구들과 놀고 있던 아이들을 데리고 선생님께 뛰어가곤 했습니다.


아마 예민한 사춘기였던 저희들에게 예민하게 대하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사랑이 큰 위로가 됐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복도에서 선생님과 마주치는 날엔 다음 수업 시간이 즐겁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던 중학교 3학년의 어느 날, 전 선생님께 큰 실망을 안겨 드려야 했습니다.


친구들과 짓궂은 장난을 하다, 새로 부임 오신 체육선생님께 ‘딱’ 걸려 혼나게 되었는데, 하필 그곳에 선생님이 앉아계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짓궂게 놀았던지 교실 안에 있는 친구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골리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별안간 선생님들이 계셨던 방문이 ‘쿵’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습니다.


“너 이놈들, 세 명 이리 와!”


“예?!”


“지금 너네 이리오라고!”


새로 오신 체육선생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전혀 알지 못했기에 장난꾸러기 세 명은 긴장한 표정으로 그분께 걸어갔습니다.


“안으로 들어와.”


무거운 목소리가 귀에 내려와 앉았고.

  

들어선 방안, 안쪽 창가 앞에 앉아계신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과 눈을 마주친 순간, 제 고개는 급히 아래를 향해 꺾이고 말았습니다.


“누가 소리쳤어?!”


체육선생님의 목소리였습니다.


한 명의 목소리가 아니었고 이는 선생님도 아신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지만, 한 친구의 장난기가 불현듯 분위기를 전환시켰습니다.


그 친구는 장난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얘요.”    


말 끝나기가 무섭게, 선생님은 강한 사랑의 매로 저희를 다스리셨습니다.

짧지만 강한, 한대의 매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습니다.


후에 저를 제외한 친구들을 교실로 돌려보내셨고 뒤에 남은 저는 훨씬 더 강한 강도의 사랑의 매를 맛봐야 했습니다.


서러움에 눈물이 터졌습니다.    

억울함에 삐져나오는 콧물은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알려주는 창피한 증거였습니다.

그런 저를 보시고 선생님께선 매질을 잠시 멈추셨습니다.


“뭘 잘했다고 우나! 억울한 게 있으면 말해.”


친구에 대한 의리였는지, 단순히 말하기 싫은 오기였는지, 알 수 없는 고집을 부리며 죄송하단 말만 연신 내뱉었고 제게 허락된 것은 험한 말들과 또다시 시작된 따귀였습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서야 선생님은 울고 있는 저를 화장실로 보내주셨습니다.


어두웠던 화장실 세면대에서 급히 찬물을 틀어 세수를 하던 때, 끝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은 물로 젖은 얼굴 위에 명확히 한 줄기씩 흘러 뜨거운 감촉을 느끼게 했고 괜스레 서러움이 터져 더욱 펑펑 울었습니다.


기다란 휴지를 풀어 얼굴에 적신 눈물을 닦아내다가도, 다시 차오르는 억울함은 짧게 끝내고픈 화장실에서의 시간을 길게 끌도록 만들었습니다.


빨갛게 열이 오른 눈을 껌뻑거리며 다시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걸어갔을 때 체육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리 와.”


선생님의 낮은 목소리가 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고들은 이전에 듣던 것들과 비슷한 내용들이었지만 유달리 귀에 잘 들어오는 말씀이었습니다.


“가 봐.”


하시며 저를 놓아주시는 선생님께 꾸벅 인사를 드리고 문고리를 향해 손을 내미려는 순간,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의 근엄하지만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리 잠깐 와.”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대답을 내뱉기가 힘이 들어, 천천히 몸을 돌려 선생님이 앉아계신 책상 뒤에 다가가 섰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보시기 위해 의자를 돌리셨고 저의 모습을 주변 선생님들께 보이지 않게 하시기 위해 낮은 의자에 저를 앉게 하시며 작은 등으로 저를 가려주시고서야 말문을 여셨습니다.


“여기 선생님들도 다 모여계신데 바로 앞에서 소리 지르고 하면 안 되지, 그래 안 그래?!”

   

하시며 크게 소리치셨고 저는 죄송하다며 고개를 떨궜습니다.


그 후로 보였던 것은 선생님 신발만 바라보던 제 눈에서 멀어지는 눈물들로 인해 다시금 흐려지고 있는 제 시야였습니다.


떨리는 저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이번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시듯 말씀하셨습니다.


“괜찮아 아들, 혼자서 그런 거 아니잖아. 엄마가 다 알어.”


목젖 아래 눌러놓았던 뜨거운 공이 아랫입술 위로 올라와 소리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바닥에 손을 짚고 서러운 마음을 눈물로 쏟아내었습니다.


냉기가 서린 바닥에, 빗방울이 돼 번져가는 제 서러움을 보시곤 선생님은 본인의 품으로 저를 안아주셨습니다.


오랜 시간 지속된 쏟아냄의 시간이 다 끝날 때까지 선생님이 해주신 것은 가만히 계셔주심과 더불어, 간헐적으로 들리는 ‘괜찮아.’하는 소리와 함께 떨리는 제 등을 쓰다듬어주시는 위로였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던, 저를 혼내신 선생님은 수업이 있다 말씀하시며 닫힌 문을 열어 슬그머니 나가셨고, 열렸던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에 저의 울음은 막힘없이 더욱 커졌습니다.


서러움이 개운함이 돼 울음이 작아졌던 때, 선생님은 품 속 손수건을 꺼내 더 이상 얼굴 위 눈물, 콧물이 그려지지 않도록 지워주셨습니다.


손수건에 담기지 않아 마지막까지 볼을 타고 흐르던 제 눈물을 자신의 손으로 닦아주시며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괜찮아 아들.”


선생님의 온기가 말을 통해 느껴졌습니다.


여러 논리적인 해명을 떠나 그저 떨고 있던 저를 있는 그대로 감싸주신 그분의 손길에 놀랐던 마음이, 마지막 눈물과 함께 씻겨져 내려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현재이지만 과거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 짓다, 어느 순간 기억이 깊어지는 곳은 선생님께서 제 눈물을 닦아주신 그날입니다.


장난기와 순수함이 가득 차 있던 마음과는 달리, 커진 육체만큼의 성숙함을 요구받았던 당시엔 참 많은 것들이 부당한 것 같다 느껴졌었는데, 당시 책임과 성숙함을 저희들의 의무로 보시지 않고 그저 ‘자라나는 마음’으로 들여다 봐주신 선생님이셨기에 선생님이 더욱 보고 싶어지는 요즘입니다.


졸업하고 한 번도 뵙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과 더불어, 이젠 학교에 계시지 않아 뵙기가 어렵다는 소식은 가슴에 담아두었던 제 소중한 추억을 급히 뜨겁게 만들곤 합니다.


저는 현재, 당시 선생님 연세의 반, 그보다 조금 넘는 삶을 살아온 것뿐이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계산적으로 바뀌어가는 세상 모습에 놀라, 저 역시 세상에 굴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가끔은 이런 제 모습이 그때의 선생님과 비교돼 서글퍼지곤 하지만, 생각의 끝이 닿는 곳은 그런 부정적인 결말이 아닌, 제 학창 시절을 그런 귀한 분과 함께 했었다는 감사의 결말입니다.


어찌 그렇게, 아이들을 ‘사람’ 하나로만 보셨는지.

어쩜, 아이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먼저 들어주셨는지.

어쩌면 그렇게, 우리를 ‘그냥’ 품으셨는지.


학교생활에 수업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싫었던 그 시절, 그럼에도 선생님과의 이야기는 ‘시험에 나왔으면 좋겠다.’ 생각할 만큼 즐거웠고, 하루에 두 번씩 들리던 선생님의 노래들은 왠지 모르게 ‘그냥’ 좋았습니다.


일상을 살다, 우연히 선생님을 마주치는 날이 온다면 반가운 마음에 선생님을 ‘와락’ 안아드리고 싶다가도, 빠르게 변한 세상만큼 변질된 저의 모습을 들여다보시며 제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 감정이 또 하나의 거울이 돼 저 자신을 비추지만 아직은 당당하지 못한 제가 서있습니다.


선생님, 그때의 그 위로는 제가 타인을 대할 때 저의 모습을 여러 번 돌아보게 했던 장면이었습니다.

서럽게 울컥했던 그때의 제 모습보다, 그런 저를 다독여주셨던 선생님의 모습이 제겐 더 큰 장면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어리기만 했던 제가 성장할 수 있도록 마음 담아주신 선생님이셨기에 저의 긴 학창 시절은 그늘보단 빛의 범위가 클 수 있었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선생님을 뵙게 될지 모르지만 선생님, 항상 건강하십시오.


불현듯 마주칠 수 있는 그때에 부끄럽지 않은 선생님 제자의 모습으로 정중히 인사드릴 수 있게 저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겠습니다.


수많은 제자들 중 한 명인 저이지만, 선생님은 제게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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