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이 문화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까지 이해를 해야 더 빠르다는 것을 요즘 들어 부쩍 깨닫게 되는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문화적 사회적 배경 없이 한국에서 오지게 공부하고 시험 봤던 영어가 현지에 오면 잘 적용이 안 되는 것도 이런 이유가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해봤다. 사실 한국에서 우리 부부 둘 다 영어를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초등 영어교과 시대를 연 세대), 영어 과외 선생님으로 가르쳐도 봤고, 잘 하려고 별짓을 다 해봤고 (미드 보기, 전화영어, 섀도잉, 외국인 회화, 통째로 책 외우기, 일기 쓰기 등), 그래서 오래전이긴 하지만 수능, 오픽, 토익 같은 국내 영어 시험을 말하자면 다 고점을 찍었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스스로 한국 영어 시험에는 어느 정도 도가 텄다고 생각했다 (참고: 실제 가장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책 통째로 외우기와 외국인 회화, 가장 효과가 미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드 보기와 섀도잉 - 누군가 이걸로 실력이 올랐다면 '추측건대' 이 두개만으로 엄청난 효과를 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함, 다른 것을 메인으로 하면서 이건 부수적이었을 것이라고 봄).
어쨌든 나는 전형적인 한국인답게 시험에서 고득점인데도 뭔가 영어가 원하는 수준까지는 안 되는 것 같아 답답하고 늘 고민이었는데 그 나머지를 영국에서 채우며 나름 언어 체득에 깨달음을 얻었다면 얻었다랄까. 보통 언어 습득 단계를 분석해 놓은 책들을 보면 정체구간이 있다가 한 번에 팍 오르고, 그다음 또 정체구간이 있다가 한 번에 팍 오르고 이런 식인데,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어느 정도 단계까지 도달하면 그 팍 오르는 게 안된다.
여행영어: 여행 가서 바디 랭기지와 적당히 학창 시절 배운 회화 영어를 사용해서 살 수 있다. 외국이라고 나가 있긴 하지만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대부분 모국어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들도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영어만 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서로 간단한 단어로도 대화가 잘 되는 편이다. 오히려 여행지에서는 유창한 영어가 더 안 통한다. 외국어로 말이 통한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고 동기부여하기에 좋은 것 같다. 사실 이 단계는 비기너 레벨에 가깝기 때문에 여기선 영어 공부를 조금만 빡세게만 해도 생활 영어 수준으로 올라가는 듯하다.
생활영어: 영어권 국가에서 관공서 업무를 처리할 정도의 수준이라 생각된다. 캐주얼하게 외국인들과 가벼운 주제로 얘기를 할 수 있는 정도 되며 (한국 소개라던가, 취미, 좋아하는 영화, 운동 같은 소재들) 정도이 차이는 있으나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수준은 된다고 생각된다. 이 단계에선 상대를 불문하고 그냥 많이 말하면서 연습해야 실력이 느는 것 같다. 보통 한국의 교육 과정이 주입식이라 (듣기/읽기/단어 암기를 잘 커버해 줌) 이 단계까지 빠르게 올려주기 때문에, 어느 정도 교육과정을 잘 마치고 그 토대로 교육과정에서 비중이 적었던 말하기 연습만 열심히 한다면 생활영어까지는 무난하게 커버가 되는 것 같다.
아카데믹 영어: 입시용이 아니라 학위를 위한 영어 수준. 에세이를 쓸 수 있고 자기주장을 논리적으로 70% 이상 말할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된다. 이 정도 되면 속도는 좀 느릴 수 있지만 신문을 읽고, 성인용 영어 소설 같은 책 보기가 가능하다. 이 단계는 생활영어 단계에서 영어를 아주 집약적으로 밀도 있게 시간을 오래 두고 공부해야 갈 수 있는 단계 같다. 적어도 내가 24시간 쓰는 한국어와 영어 비율이 1:9 정도로 1-2년 지속돼야 가능 한듯하다. 사고를 영어로 해야 이루어지는 단계이기 때문에 충분한 숙달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이 들었다. 다만 경험상 나이가 어리면 들여야 하는 밀도와 시간이 줄긴 하는 것 같다. 어릴 때 (한글을 뗀 초딩정도) 영어로 사고할 수 있는 수준 정도로 익힌 정도면 성인 돼서도 바로 이 단계 이상까지 빠르게 진입이 가능한 것 같긴 하다. 그러나 성인이 돼서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영역이다. 사고가 영어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꿈을 영어로 꿀 수도 있다.
비즈니스 영어: 업무 수준과 업종에 따라 용어와 그 깊이가 달라서 비즈니스 영어라는 것이 좀 주관적이긴 하다. 때문에 ‘유창하다고’ 생각되는 비즈니스 영어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여기서부턴 문화적 사회적인 배경이 함께 들어가기 때문에 시간이 무르익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전 단계들에서는 내가 주로 돈을 ‘내고’ 배우기 때문에 상대방이 아주 호의적이며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주는 반면, 비즈니스에서부터는 돈을 ‘받고 ‘하기 때문에 개떡같이 말하면 정말 개떡같이 전달되고, 남이 말한 개떡도 찰떡처럼 알아들어야 하는 어떻게 보면 영어 접근 방식이 달라진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유창한 비즈니스 영어는 설득하는 능력과 토론 스킬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기주장을 주로 얘기하는 아카데믹 영어보다도 더 잘 자기 생각을 (8-90프로 이상)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화 속에서 이들이 쓰는 은어라던가 굉장히 구어체적인 숙어와 어구들 내가 생전 들어보지도 책에서 보지도 못한 말들이 튀어나오기 때문에 결국 이런 환경에 오래 꾸준히 노출되어야 뭔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다. 이 정도 레벨이라면 사회/문화적 배경에 노출이 어느 정도 되어있고 개떡을 찰떡으로 알아듣는 연습을 통해 뉴스/드라마와 같은 프로그램을 같은 것을 100%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자막 없이 어느 정도 볼 수 있다.
코미디 영어: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코미디 영어를 이해하는게 가장 난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문맥상 숨겨진 의미도 이해하고 유추해야 하고, 이건 한 10년 이상(?) 오래 산 로컬 정도 돼야 도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2002년 월드컵의 추억이나 일화와 같은 경험은 한국 사람들만 공유하는 것이고 여기서 나오는 한국의 2000년대 초반 감성에 나는 깔깔대고 웃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들끼리도 공유하는 그 나름의 추억과 소재가 있기 때문에 이건 뭐 공부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은 친구 동생이 희극인이라 런던에서 블랙코미디 공연을 초대받아 갔는데 룰도 모르는 크리켓이나 럭비 경기부터 해서 정치 풍자 같은 말장난을 계속하는데 10%도 이해를 못 했다. 같은 맥락으로 tv 쇼를 봐도 공감이 안 가는 포인트들이 있는데, mother tongue이 아닌 이상 굳이 이 단계까지는 가지 않아도 되지 않나 싶긴 하다.
결국 언어라는 것이 뭔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인데, 그 쓰임이 어느 정도일 것이냐에 따라서 각자 수준을 맞게 적당히 익히면 되지 않나 싶다. 전 국민이 평생 동안 영어 교육에 엄청난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가며, 어쩌면 시간과 노출이 해결해 주는 (언어는 공부가 아닌 연습이기에) 비즈니스나 코미디 영어까지 도달하려는 것이 되려 자원 낭비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주변에 외국에서 자란 bi-lingual 들을 보면 언어를 둘 다 유창하게 하는 것 같으면서도, 깊이 있게 들어가면 그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한국말과 영어가 생활용-아카데미 수준 중간에 있는듯한 애매한). 그래서 든 생각이 언어를 관장하는 뇌에 한계치가 있나(?) 싶었던 것인데, 한 언어를 아주 잘하던가, 두 개를 할 수 있다면 대신 반반 정도로만 잘하는 느낌이고, 세 개를 하면 그 깊이가 더 떨어지는 느낌이다. 결국 다 자기만족이겠지만, 요즘 하도 주변에 200-300만 원짜리 영어 유치원 붐(?)이길래 들었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