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이퀴리 Nov 23. 2018

마지막 시험날

 20대 끝자락에서 느꼈던 불안과 분노의 이유

 4학년 2학기 겨울 계절학기의 마지막 시험 날이었다.


 졸업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생사가 걸린 시험이었다. 주 전공은 아니고 경영학 관련 수업이었는데,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면 미래는 더 이상 기다릴 가치도 없어 보였다. 당시 28살이었고,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4학년 1학기까지 바닥을 치던 점수를 거짓말처럼 지우고 회복시키려는 얄팍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지 졸업 후에 번듯하게 이력서를 제출할 수 있는 학점만은 품고 학교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모든 대학 생활을 통틀어 가장 필사적으로 외우고 밤을 지새운 결과일까? 비교적 이른 시간에 문제를 다 풀고 강의실을 나왔다. 1층 로비에서 서성이다 목이 말라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하나 뽑아 마셨다. 그 사이 같은 시험을 치른 친구 J와 S가 나왔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흡연 장소로 향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방금 치른 시험 이야기를 간단히 나누었다. 뭐가 답이었다느니, 어떤 문제가 나왔어야 했는데 왜 안 나왔을까 하는 따위의 무의미한 말을 연기 속에 풀어냈다. 대학생으로서 치른 마지막 시험이라 뭔가 아쉬웠고 허무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서로의 앞날을 쓴웃음과 함께 자축하고자 학교 앞 골목에 있는 중국 음식점으로 향했다.


 오전 11시 40분. 술을 마시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으나, 없으면 아쉬운 타이밍이었기에 간단히 반주만 할 생각으로 소주와 함께 짬뽕, 탕수육을 주문했다. 음식을 먹으며 오늘의 시험과 지난 대학 생활을 돌아보았다. 밤새 미친 듯이 놀던 날, 학구열에 불타 도서관 구석 자리에서 얼굴을 책에 파묻고 살던 때가 떠올랐다. 사랑앓이에 속을 태우며 답이 나오지 않는 끝없는 상담을 친구와 이어나가는가 하면, 문득 모든 게 부질없어 보여 머리를 비운채 멍하니 캠퍼스를 돌아다닌 날도 생각났다.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술잔을 계속 비웠다. 비우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오후 3시가 넘어가 있었고,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간단히 반주만 하고 집에 가 쉬어야겠다는 계획은 잊힌 지 오래였다. 어차피 오늘 이후로 취업 전까지 매일 쉬게 될 일이었다.

 

 중국 음식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김치찜 가게가 있었다. 끓어오르는 빨간 국물 위로 소주잔을 모으길 반복하며, 연신 들이켰다. 왜 그렇게 마셨을까. 뭐가 그렇게 기뻤을까. 아니 아쉬웠던 걸까?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산더미이고 한없이 나약하기만 한 내가, 벌써 사회로 진출해야 한다는 사실이 막연한 두려움으로 다가왔을까? 여러 고민이 마음속에서 그물처럼 엮이고, 취기가 올라왔다.

 그러다 오래된 한 친구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카톡방에서의 사소한 시비가 전화까지 이어졌다. 술집 앞에서 벌게진 얼굴로 언성을 높였고, J와 S는 옆에서 담배를 피웠다. J와 S는 불을 끄고 가게로 먼저 들어갔고, 잠시 후 나도 통화를 끝내고 따라 들어갔다.

 자리에 다시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시니, 퍼뜩 정신이 들었다. 별 거 아닌 일에 너무 심하게 화를 내버렸다. 평소 같으면 그냥 넘어갈 일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이유 모를 괴로움과 분노에 나도 모르게 휩싸였다. 그리고 그것을 토해 낼 출구가 수화기였고, 통화를 하고 있던 친구는 나의 분노를 영문도 모른 채 받게 되었다.


 그 날 나는 20대 시절을 통틀어 가장 많은 술을 마셨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부터 막차가 끊기기 직전까지. 아쉬움과 새로운 출발의 설렘과 불안이. 나 자신의 분노에 휩싸여 친구에게 토해낸 화와, 그 후 밀려온 후회와 자책이 날 과음으로 이끌었다. 귀가 후 바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에 잠시 깨었을 때, 아픈 머리를 붙잡고 친구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오늘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미안하다고. 그게 그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연락이었다.


 쓸쓸한 졸업식은 금방 찾아왔고, 공식적으로 취준생이 되었다. 1년 반 동안 웃어도 웃는 게 아닌 답답한 나날을 보냈다. 그 날의 긴 술자리는 이 모든 불안의 신호탄이었을까.  

 마치 누군가 나의 시간과 젊음을 약탈해가고 있는 것 같았고, 아무것도 될 수 없으리라는 무기력함이 매일 마음속에 들어왔다 나가곤 했다. 취업을 하면 모두 끝나고 가벼워지겠거니... 했는데, 회사에 다니고 있는 지금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태생적 불안함은 사람을 쉽게 떠나지 않나 보다.

 J와 S는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내 분노를 받은 친구는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짧고 빠른 것에 대한 반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