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이퀴리 Apr 13. 2020

첫번째 퇴사

Feat- 의류벤더 권고사직

퇴사했다.


 4월 3일이 마지막 출근이었다.

 채용될 때는 면접도 여러 번 보고 애타게 하더니, 몰아내는 시간은 너무나 순식간이었다. 단 며칠 만에 정리될 직원들이 정해지고, 경영진들과 간단히 미팅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몇 마디 들었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무서운 전염병은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사업에도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그 타격의 책임은 일방적으로 모든 오더를 캔슬한 바이어도 아니고 경영을 하는 사람들도 아닌, 열심히 출근하던 직원들에게 돌아갔다. 함께 권고사직을 당한 동료들의 심정은 모두가 다를 것이다. 나는 회사에 크게 악감정도 없고 저주를 퍼부을 자신도 없다. 권고사직이 결정되고 며칠 동안은 아쉽고 복잡한 심경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으나, 어떻게 보면 퇴사의 꿈을 강제로 이루었으니 기쁘기도 했다.


사직서를 결제 받을 때 그 미묘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미주 의류 브랜드 바이어에게 다음 시즌 옷의 주문을 받고, 원단과 자재를 발주하여 공장에서 생산까지 하는 OEM 사업, 즉 의류벤더 회사에 다녔다. 입사 후, 2년쯤 지난 시점부터였을까. 퇴직 욕구가 매우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이미 의류제조산업은 한국에서 저물어가고 있었고, 구조조정을 감행한 경쟁사 이야기도 자주 들렸다. 미래가 불투명한 산업에서 결단하고 스스로 발전하지 못하면 나중엔 더욱 이직이 힘들어지고, 고인물에 갇혀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과감히 퇴사할 용기는 없었다. 안 그래도 청년실업이 넘쳐나고 있는 시대에 해고를 당하지도 않고 정규 직장을 그만두는 행위는 미친 짓이라고들 말했고,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모험하는 성격도 못 되는지라, 일단 버텼다. 버티면서 여기저기 다른 회사에 지원했고 필기시험도 봤다. 이직은 쉽지 않았다. 불과 2년 전에 취업에 성공하여 기뻐했던 내가, 다른 입사를 위해 다시 취준생처럼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노력했는데 또 노력해야 하는 세상이라니. 언제까지 노력하고 찾고 발전해야 하는가. 그냥 한 번 노력하고 편하게  살 순 없을까. 그렇게 짜증을 부리던 와중에 코로나바이러스가 터졌다.



나의 자리. 모니터 받침대가 없어 A4용지 두 묶음을 받쳐두엇다.


 여행사, 항공사가 최전선에서 가장 먼저 영향을 받았고, 의류산업도 3월부터 본격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회사의 결단으로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팀은 권고사직 대상이 되었고, 항상 꿈꿔왔던 퇴사의 적절한 기회(?)가 찾아왔다. 그렇게 열망하던 퇴사를 반강제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진짜 출근을 하지 않게 될 거라고 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취업할 수 있을까. 생활방식이 엉망이 되어 폐인이 되진 않을까. 자존감이 낮아져 패배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까.


 여러 복잡한 심경을 뒤로하고, 우선 부모님께 알렸다. 속상해하시다가도, 다시 취업하면 된다며 몸 잘 챙기라고 위로해주셨다. 형도 지금의 퇴사는 내 잘못도 아니니 떳떳하게 생활하라고 힘을 주었다. 정신적 멘토 역할을 해주던 교회 형도 '야, 짜증나는데 뭐하러 출근해. 걍 내일부터 출근하지마. 다 엿먹으라 그래!'라는 조언을 해주었고, 친구들은 퇴직금과 위로금이 부럽다고 했다.


 쉬면서 무엇을 하며 지낼지 계획을 짜보고 나름 실행하고 있다. 만약 퇴사를 하게 되면, 바로 해외여행을 떠날 생각이었으나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니 패스.



[퇴사 후 계획]

1/ 고용센터에 가서 실업급여 절차를 밟았다. 생각보다 인천에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금방 끝낼 수 있었다.


2/ 운동을 꾸준히 하기로 했다. 동네에 좋아하는 달리기 코스를 달린다. 달리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날려버리고 심장을 괴롭히며 상쾌함을 느끼고 있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실천하는 게 목표다.


3/ 글을 가까이하고자 한다. 회사에 다니면서 책도 많이 못 읽고, 글 쓰는 취미와도 멀어졌다. 블로그, 브런치에 글을 쓰고 일고 싶던 책도 잔뜩 읽고 싶다.


4/ 영어공부를 하고 싶다. 회사에서 해외영업을 하며, 영어는 매일 접했으나 사용하는 단어와 패턴의 반복이었다. 다양한 어휘를 활용하여 폭넓은 생활 영어를 구사하고 싶다.



 이 외에도 여행, 캠핑, 공원에서 멍청히 있기, 디제잉 배우기 등등할 게 많이 생각난다. 그리고 틈틈이 이력서와 자소서를 써야지.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권고사직 꽤 괜찮아 보인다. 하루하루 행복하고 꽉꽉 채워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퇴사 후 일주일이 지났다. 아직은 불안감보다는 자유로운 이 생활이 무척 만족스럽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는 중 찾아온 뜻밖의 백수생활. 이 바이러스와 함께 나의 무직 생활도 함께 청산되면 좋겠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만족이 불행으로 바뀌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나의 생활을 차근차근 영위해 나가기를.







작가의 이전글 마약, 기도, 씨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