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잠에서 깨어나고 푸른 싹이 돋아나는 건강한 기운을.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새 학기를 맞이하는 학생들의 설렘을. 벚꽃 아래서 사진을 찍고 봄노래를 부르는 사랑스러운 연인들의 모습이 있는 이 계절을 좋아하지 않는다.
딱히 멀리할 풍경은 아닌데, 감흥이 없다. 선천적 외로움이 낫지 않는 감기처럼 지독하게 굳어버린 탓일까. 모두가 좋아하니까 나 하나쯤은 안 좋아해도 되겠다 하는 삐딱함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어서 이 활기찬 기운이 사라지고, 봄노래가 끝나고, 벚꽃이 지기만을 바라왔다. 3월만 되면, 자동적으로 다음 계절이 오길 열망한다. 개나리가 피는 시간은 겨울옷을 정리하라는 신호에 불과하다. 혹자는 "봄마다 솔로라서 그저 옆구리 시린 패배자의 넋두리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봄에 여자 친구가 있던 시절도 느끼던 감정이었다. 그러니 그것과는 별개로 봄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 봄 햇살 아래 모두 일어나려 하지만, 나는 아래로 떨어지고만 싶었다. 봄의 따스함 아래 모두 살아나려 하지만, 나만은 계속 죽어있고 싶었다.
도대체 왜 봄과 친하지 않을까?
학창 시절.
의지와는 상관없이 봄에는 학급이 바뀌고 학년이 올라갔다. 새로운 만남, 새로운 배움, 새로운 목표가 다가왔다. 익숙함을 뒤로하고 낯선 것을 맞이하는 일은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했다. 처음 접한 일과 친구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주변에서 내게 거는 기대치 이상을 보여주고 싶었고, 실망시키기 싫었다. 생각대로 전개되지 않는 하루의 실망과 관계에서 오는 피로로 눈물을 흘린 날도 있었다.
20대 초반.
모든 생명이 시작되는 봄에, 그 무엇보다 아끼던 생명이 떠나갔다. 큰 충격으로 표정 없는 나날을 보냈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고, 모든 의지가 사라진 듯한 시간이었다. 봄 비에 젖은 학교 운동장을 묵묵히 바라보곤 했다.
올봄이 찾아올 무렵.
섣부른 판단으로 사랑에 실패했다. 사랑은 혼자 완성할 수 있는 그림이 아니었다. 아무리 뜨거운 열정과 진심으로 다가가도, 흔들 수 없는 마음이 있었다. 사람 감정을 사람인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이 축적되어 자연스럽게 봄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정리하고 보니, 반대로 나의 이기심이 너무 넘쳤던 건 아닌가 되짚어 본다. 두려움을 이기고자 모든 것을 소유하려 했다.
새 학기의 친구들에게 관심과 주목을 얻어 그들을 소유하고 싶었다. 언제나 곁에 머물 것 같았던 지인의 죽음을 부정하고 내 안에 계속 간직하려 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얻을 생각만 했다.
어찌 보면, 봄에 나는 죽어 있던 게 아니라 누구보다 살고자 했던 마음이 컸던 것인지 모른다. 아무도 잃기 싫어서, 뺏기기 싫어서, 소중한 순간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서 기운찬 봄의 활력으로 스스로를 가득 채웠는지 모른다. 이렇게 몸부림쳐도 떠나가는 것들을 붙잡지는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늘 봄이었다. 엄마가 잘못하지 않아도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투정하듯, 그때마다 묻어나는 아쉬움과 슬픔을 봄 탓으로 돌렸다. 모든 것은 떠나가기 마련이다. 봄은 단지 거기 있었을 뿐이다.
슬픈 날을 함께한 봄을 싫어했다. 오히려 슬픔을 지켜보고 함께해온 시간들을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에 그 계절의 아름다움을 저주했다. 또다시 떠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까 두려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본다.
'이제부터 봄을 좋아하겠다'라고는 말 못 하겠다. 그래도 봄이 오면 옆에 서 있는 것 정도는 괜찮을 듯싶다. 항상 봄이 거기 있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