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호][문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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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란 무엇일까요? 그저 묵묵히 빈자리를 버티는 게 애도인 걸까요? 아니면 목이 찢어지도록 통곡하는 것? 그것도 아니면, 장례식장 한구석에 화투판을 벌인 채 왁자하게 떠드는 것? 저는 애도를 ‘평생에 걸친 작별 인사’라고 말하려 합니다.

준비된 이별이든, 갑작스러운 이별이든 상실은 언제나 고통스럽습니다. 이별의 형태가 다양한 만큼, 애도 역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끊어진 일상을 억지로라도 다시 이어 붙이고, 소리 높여 굿과 잔치를 하고, 납골당을 예쁘게 꾸미고, 글과 노래, 그림을 남기면서요.

때로는, 감정을 아예 과장해 버리거나 감추는 방식을 선택할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애도를 이야기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애도는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은 자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또 기억하기 위함이지요.


그럼에도 잠을 자고, 그럼에도 밥을 먹고

2024년 00월 00일 0요일 날씨 흐림

얼마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급하게 기차를 타고 내려간 장례식장에는 온 가족이 모여 있었다. 이미 눈물 자국이 짙은 가족들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 말없이 빈소 바닥만 쳐다봤다. 영정 사진을 보고, 상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서도 실감이 안 났던 걸까. 빈소 입구의 데스크에 앉아 있으면서도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렇게 사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는데, 어이없게도 배가 고파왔다. 그 와중에도. 순간 우리 몸뚱이는 눈치가 지지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살아있다는 걸 티라도 내려는 건지 배가 비었다 싶으면 때와 장소도 구분않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앉은 식탁 앞에서는 곧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따뜻한 밥이 앞에 놓이고 그걸 입에 넣는 순간, 처음으로 눈물이 차오른 것이다. 동시에 내 안에서는 무언가 거세게 엉키고 뜨겁게 아려오기 시작했다. 그게 무언지 도무지 정의할 수 없어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할머니가 그리워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그 와중에도 배가 고파 밥을 먹는 게 죄스러워서 그랬던 걸까?


이후로도 쉴 새 없이 누군가를 먹이고, 또 먹고, 씻고 잠에 들고, 다시 배를 채우는 행위가 반복됐다. 바닥을 보인 음식을 주문하고, 빈소를 찾은 손님들을 맞고. 바로 옆에 딸린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북적임이 끊이질 않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장소가 장례식장이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우리는 여전히 일상의 한복판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떠나버린 이를 향한 그리움, 미안함, 사랑, 후회를 한가득 품고서. 이제 내게 남은 건 한 가지의 의문이다. 일상을 영위하는 것도 애도가 될 수 있을까? 억지로라도 밥을 먹고 또 잠을 자고. 때로는 모든 게 괜찮아진 듯 웃고 떠드는 게 애도가 될 수 있을까. 설령 그것이 괴로움을 수반하더라도.

‘슬프고 슬퍼한다’1)라는 의미로 직역할 수 있는 애도의 전제는 ‘상실’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든, 관계의 끊어짐이나 박탈이든, 나와 연결되어 있던 일부 또는 전부가 ‘사라졌다’라는 감각. 이 감각은 존재의 부재와 그러한 ‘단절’을 겪은 이들의 내면에서부터 거대한 파동을 일으킨다. 혹자는 이를 ‘자연스러운’ 혹은 ‘정상적’인 애도 반응이라고 정의한다.2) 현실을 부정했다가, 화도 냈다가, 원래대로 돌려놓아 달라고 빌어도 봤다가. 그 일련의 단계들을 거치고, 마지막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건강한 애도’를 마쳤다고 보는 것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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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떠난 반려동물과의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았던 한 반려인의 질문. 익명의 답변자는 이에 ‘놓아준다는 것은 추상적 바다에 쏟아붓는 것이며, 그렇게 하면 영원히 잃지 않게 된다’라는 답변을 남겼다.


이러한 정의는 분명 상실을 겪은 이가 너무 오랫동안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일 테다. 그러나 재난과도 같은 단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남겨진 자들’, ‘산 자’들에게는 그러한 절차마저 버겁게 느껴진다. 설령 그 누구의 ‘탓’도 아닐지라도 생존본능은 수치가 되며, 허기와 수면욕을 느끼는 자신은 역겨운 존재로 전락한다. 스스로에게 일종의 ‘벌’을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딛고 있던 땅이 무너졌는데, 어떻게 다시 일어설 마음을 쉽게 먹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때는 그 위태로움을 붙잡아 줄 난간이 필요하다. 당신이 숨을 쉬는 법조차 잊어버리고 말 때, 생을 이어가는 것마저 고통이라고 느낄 때 그것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말해주는 이가 곁에 있어야 한다.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눈이라도 감고 있도록 조용히 챙겨주는 것.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무너진 땅이라도 두 발을 붙들 수 있도록 기꺼이 내어진 손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분명 힘이 있다. ‘사람을 살리는 힘’ 말이다. 그렇게 살아난 이들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4)에 맞추어 애도의 준비를 마친다.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 레이먼드 카버,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5)

사람마다 다른 “아픔의 리듬”6)에 따라, 세상에 자리 잡아온 애도의 방식 또한 매우 다양하다. 추모식을 진행하거나 납골당, 묘 등 망자를 모신 곳을 찾고, 시·소설·노래·그림·사진·영상 등 예술의 영역과 ‘굿’이라는 무속 신앙의 형태로도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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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소년이 온다>. 각각 제주 4·3 사건과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작품이다. │ (우) 독일의 예술가 케테 콜비츠의 <애도>(1938)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아들을 애도하며 만든 작품이다. Ⓒ K스피릿


애도는 이렇게 다양한 얼굴로 기록된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재현’하거나, 완전한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거나, 상실에 ‘익숙해지려 하는’ 하루를 수기로 작성하는 등. 형식만 조금씩 다른 이 ‘기록물’들은 엄연한 기억 장치다. 이 장치는 한 개인부터 작은 공동체, 또 국가까지 사회적 차원을 넘나들며 유효하게 작동한다. 그리고 장치를 남기는 ‘기록’ 행위는 다소 필사적이기도 하다. ‘산 자’들의 ‘살기 위한’ 행위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그리움을 달래고, 떠난 이와 함께했던 시간을 잊지 않으려 하고, 자꾸만 망각되고 마는 역사적 진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결국 사람들은 그들의 기억을 어딘가에, 어떻게든 ‘남기면서’ 고통을 치유하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산 자’는 그 모든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당사자이기도 하기에.

어떠한 존재의 소멸에 함께 공감할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될 수 있다고 한다.7) 그러므로 ‘애도’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단연 ‘공동체’가 될 것이다. 당사자가 감내해야 할 몫, 또는 사안에 대한 책임을 논하는 것 외에도, “상처에 대한 치유는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을 나누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8) 이때 다양한 갈래의 애도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망각되기 쉬운 역사적 기억의 경우, 다양한 창작물로써 공동체 단위의 “애도로써의 치유”9)가 시도되기도 한다. 일례로,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 운전사>(2017)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다룬 영화 <1987>(2017)은 영화적 ‘재현’을 통해 “우리의 망각된 과거를 살아 있는 현재로 소환하고, 관객들을 과거의 민중들이 겪었던 고난에 대한 ‘애도의 공동체’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0) 한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독자, 관객, 또는 청자의 위치에서 함께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사후적 기억하기”를 수행함으로써 “애도와 치유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11)

그렇다면 그 고통의 기억을 ‘다양한 방식으로도 들여다보고 남겨진 이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사후의 아픔을 공유해야 하는’ 이유 역시 떠올려 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엄연히 살아 있는 존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12) 시간이 흐를수록 흐려지고, 또 이어지는 과정에서 일부가 편집될 수 있음에도 우리는 계속 ‘기억’하고자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망각의 운명을 타고났음에도 ‘할 수 있는’ 일이므로. 때로는 망각 역시 치유에 도움을 주지만, 어떤 일은 잊지 않음으로써 치유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이는 역설적으로 ‘산 자’인 개인들이 기억하고, 공감하고, 연대하려는 노력, 그들이 노력할 수 있는 영역을 통해 현재 이곳의 사람들, 나아가 과거의 사람들과도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죽은 자는 그렇게 산 자를 구한다.


애도 받을 ‘자격’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에는 ‘잊혀야만 했던’ 또는 ‘기억될 이유가 없는’ 일들이 존재한다. 권위주의 정부가 자행한 국가 폭력이나, 온 국민의 피부 아래에 또렷이 새겨진 사회적 참사, 애도의 대상으로 ‘인정되지 않는’ 죽음 등… 세상에는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온몸으로 소리 내어 말하면서까지 기억하려는 죽음들이 있다. 일례로, 제주 4·3 사건은 ‘잊힌 사건’, 즉 “공식적으로 거론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이를 기억하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4·3은 제사나 굿과 같은 의례적이면서 “비공식적·일상적”인 맥락을 통해 필사적으로 기억되어 왔다.13) 어떤 죽음들에는 ‘사회적 애도’가 필요하다. 국가의 학살로 진실이 잊히고, ‘놀러 갔다가’ 죽었으니 추모할 이유가 없고, 사회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애도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이들. 이러한 죽음들은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이 순간들 속에서 어떤 감각을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이들이 모두 애도의 자격에서 ‘박탈당한’ 이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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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0월 26일 “멈추지 않는 노래를 해” 행사에서 버스킹, 행진을 진행한 ‘이태원을 기억하는 호박랜턴’의 단체 사진 Ⓒ ‘이태원을 기억하는 호박랜턴’ 공식 인스타그램


한국 사회는 “죽음에도 자격이 있고, 애도에도 위계가 있다”라는 사고를 무의식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열심히 살지 않는’, 즉 자기 계발 보다 유흥에 더 많은 시간을 쓰거나, 질서 없는 ‘위험한’ 축제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사람들은 ‘희생자’로 여겨지지 않는다.14) 사회에서 “인식 가능한 시민”,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 성소수자의 죽음15)이나 일용직·이주노동자의 노동 착취로 인한 죽음, 아직까지도 그저 ‘유난’으로 치부되는 펫로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애도 받을 ‘조건’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애도 받을 ‘자격’도 없다. “약자와 소수자는 위험 앞에서만 보편적 사람”16)이 됨에도 잊지 않겠다는 목소리에는 위로나 공감 대신 날선 비난과 조롱, 무관심이 돌아온다.

이러한 낙인 아래, 특히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 유가족이나 생존자에게는 자신이 ‘피해자’임을,17) 사망한 이들의 ‘도덕적 올바름’을 증명하고, 혹은 ‘슬픔에만 빠져 침묵할 것’18)이 당연하게 요구된다. 희생자가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왔다는 게 ‘입증’되지 않거나 소위 ‘모범생’, ‘명문대생’이 아닐 경우 이 죽음은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사회문제”19)에서 순식간에 한 “개인의 과실”20)로 전락한다. 여기서 던져야 하는 물음은, ‘왜 당신들이 애도를 받아야 하는지’가 아닌 ‘왜 당신들이 무고하게 죽어야 했는지’이다. 끊임없는 자격 심사는 사회의 취약함과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대한 논의조차 불필요한 것으로 몰아 삭제시킨다.

그러나 이를 바로잡아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는, 도리어 이 무의식을 이용하여 참사 직후에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전국에는 오직 ‘침묵’만이 허락되는 듯했으며 상호작용과 연대는 파괴되고 있었다. 국가가 “애도의 시공간을 점유”한 것이다.21) 이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된 공동체의 기억 자체와 이를 기억하려는 방식을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다. “죽음에 대해 말하는 주체가 ‘국가(정부)’”22)가 되어 버리면 희생자의 언어는 사라지고 만다. 그들의 목소리로 기록된 게 아닌 이야기는 전승되지 못하고, 책임을 물어야 할 진실은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잊히게 된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슬퍼하고 기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고민할 기회, 그리고 기억할 결정권을 권력자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죽음과 애도에 관한 문제는 곧 ‘나’와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내’가 ‘나’의 삶을 존엄하게 마무리하기 위해서.23) 각 개인이 모인 시민 사회는 죽음과 애도에 관한 논의를 계속하고 확장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이루는 시민 사회와 그 안의 수많은 ‘나’의 삶까지 책임지는 행위로도 이어지며, 그 ‘연대’는 결국 사회 전체의 ‘치유의 순환’으로도 연결될 것이다.


무사히 애도하고 또 애도 받는 사회를 위하여

애도는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삶에서 맞이하게 될 셀 수 없는 ‘작별’의 순간을 충분히 슬퍼하고 또 기억하면서 보내는 과정이다. 우리는 살아감과 동시에 죽어가고 있기에, 온전한 타자 또는 나를 이루던 무언가를 향한 애도는 나의 삶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와도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자신만의 애도가 존재하는 것이며, 각각은 그 모양도, 색도, 크기도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죽음과 상실은 언제나 두렵고,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망각이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아마 죽을 때까지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을 테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가 ‘무사히’ 또 마음껏 슬퍼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죽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크고 작은 상실을 그저 몇 초간 안타까워하고 마는 ‘불의의 사고’로, 집계된 숫자의 크기로, 집요하게 자격과 ‘급’을 요구하며 바라보는 대신. 그저 ‘생을 살아가는’ 나와 같은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애도는 시작된다.



1) 슬플 애, 슬퍼할 도

2) 국가 트라우마 센터. 「재난 정신건강 정보-심리적 반응 및 대처방법」. 『국가 트라우마 센터』.

3) 1969년, 정신과 전문의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발표한 ‘애도의 5단계’는 애도가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단계로 진행된다는 내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4) 롤랑 바르트. (2018). 애도 일기(김진영, 역). 걷는나무. (원저작 출판, 2012). 1978년 7월 18일자

5)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중 발췌 및 인용

6) 롤랑 바르트, 앞의 책, 1978년 7월 18일자

7) 오태호. (2021). 역사적 비극을 서사화하는 ‘애도로서의 치유’ 지향 소설 연구: 김숨의 『떠도는 땅』(2020)과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2021)를 중심으로, 한국문예비평연구, 74, 35쪽

8) 주유신. (2021). ‘기억의 윤리’의 관점에서 바라본 택시운전사(2017)와 1987(2017), 씨네포럼, 38, 121쪽.

9) 오태호, 앞의 글, 35쪽.

10) 주유신, 앞의 글, 130쪽.

11) 오태호, 앞의 글, 35쪽.

12) 오태호, 앞의 글, 36쪽.

13) 김성례. (2018). 한국 무교의 문화인류학. 소나무. 167쪽.

14) 1029이태원(참여연대 시민기자). 「놀다 죽은 사람 추모할 생각 없다? 희생자다움이란 무엇인가」. 『오마이뉴스』. 2023.10.25.

15) 나영정. 「퀴어한 시민권을 향해」. 『창작과 비평』.

16) 이라영. 「[야! 한국사회] 조심할 필요 없는 권력」. 『한겨레』. 2016.07.20.

17) 김관욱 외. (2024). 달라붙는 감정들. 아몬드. 165쪽.

18) 1029이태원(참여연대 시민기자), 앞의 글.

19) 정원옥. 「박탈당한 슬픔, 처리되는 시신, 장례없는 죽음」. 『비마이너』. 2019.01.03.

20) 1029이태원(참여연대 시민기자), 앞의 글.

21) 김관욱 외, 앞의 책, 164쪽.

22) 엄기호. 「애도가 사회의 크기를 결정한다」. 『한겨레』. 2022.11.14.

23) 정원옥, 앞의 글.



참고문헌

김성례. (2018). 한국 무교의 문화인류학. 고양: 소나무.

롤랑 바르트. (2018). 애도 일기(김진영, 역). 걷는나무. (원저작 출판, 2012).

1029이태원(참여연대 시민기자). 「놀다 죽은 사람 추모할 생각 없다? 희생자다움이란 무엇인가」. 『오마이뉴스』. 2023.10.25.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71858(2025.02.05. 접속).

국가 트라우마 센터. 「재난 정신건강 정보-심리적 반응 및 대처방법」. 『국가 트라우마 센터』. https://nct.go.kr/distMental/crisis/crisis01_3_2.do(2024.12.29. 접속).

나영정. 「퀴어한 시민권을 향해」. 『창작과 비평』. https://magazine.changbi.com/MCQuarterly/Item/5173(2025.02.04. 접속).

엄기호. 「애도가 사회의 크기를 결정한다」. 『한겨레』. 2022.11.14.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67127.html(2025.02.04. 접속).

이라영. 「[야! 한국사회] 조심할 필요 없는 권력」. 『한겨레』. 2016.07.20.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3196.html(2025.02.03. 접속).

정원옥. 「박탈당한 슬픔, 처리되는 시신, 장례없는 죽음」. 『비마이너』. 2019.01.03.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2985(2025.02.03. 접속).

오태호. (2021). 역사적 비극을 서사화하는 ‘애도로서의 치유’ 지향 소설 연구: 김숨의 『떠도는 땅』(2020)과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2021)를 중심으로, 한국문예비평연구, 74, 7-41.

주유신. (2021). ‘기억의 윤리’의 관점에서 바라본 택시운전사(2017)와 1987(2017), 씨네포럼, 38, 107-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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