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호] 여는 글

곧 처서가 돌아옵니다. 길었던 해가 확연히 짧아졌고, 좀처럼 식지 않아 밤잠을 설치게 했던 더위도 느릿하게나마 수그러들고 있습니다. 시간을 세는 건 의미 없는 일이라 여겼지만,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 글을 펼친 여러분은 지금 어떤 순간을 지나고 계신가요?


이번에는 조금 늦은 인사를 건넵니다. 「근맥」 89호는 발간까지 조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번 호의 모든 페이지를 할애해서라도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사주의’라는 큰 줄기와 열 갈래의 이야기는 그렇게 결정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을 학살과 세계의 무심함을 가장 먼저 떠올리면서요.


군사주의는 총성 속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복잡한 숫자와 계약서 속에서도, 푸른 잔디가 깔린 공원에서도, 바다를 건너는 작은 배 위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요. 우리가 매일 같이 먹고, 쓰고, 입는 모든 것의 경로 속에 스며 있는 것이 바로 군사주의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 너무 오래, 너무 깊게 침투해 있었기에, 사람들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어쩌면 저희도 답을 찾지 못해 이번 호를 쓰기 시작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도록’ 살아왔던 건지. 분명 인류가 평화를 염원하던 21세기인데, 왜 살상과 파괴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건지.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에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시선을 거두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한쪽이 무너져야만 시작되는 평화는 없습니다. 「근맥」 89호는 그 자명한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국익’과 ‘안보’, 그리고 ‘이윤’을 위해 ‘이미 쓰인’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군사주의의 흐름과 맞닿아 있는 여러 ‘삶’의 이야기를 만나보는 것이죠. 부디 이번 호의 물줄기들이 작은 파문을 그려 나가기를 바랍니다. 부서지는 세상 속에서 서로와 연결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2025년 여름, 편집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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