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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과 맞서 싸우는 마법소녀들은 어린 시절 우리의 친구이자 동료였다. 우리는 문방구 한쪽에 자리한 캐릭터 문구를 사 모았고, TV 앞에 앉아 스티커 북을 꾸몄다. 친구들과 캐릭터 취향을 공유하고, 마법소녀를 따라 포즈를 취하는 것은 하나의 문화였다. 우리는 반짝이는 장신구를 착용한 채 적과 맞서 싸우는 소녀들을 사랑했고 동경했으며, 그들처럼 되길 바랐다.
긴 시간이 흐른 지금, 마법소녀는 그저 애틋한 추억일까. 마법소녀의 마법은 전파를 타고 우리에게 전해졌다. 갖은 방식으로 녹아든 그 시절의 마법들. 그것들은 비단 사랑과 평화를 향하지만은 않았다. 잠깐, 소녀들의 힘은 마법이 아니라 저주였던가?
마법소녀가 되고 싶어
아동 애니메이션은 사회의 규범과 이상을 전달하는 도구다. 어린이들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사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며, 캐릭터를 모방하고 동일화함으로써 인격과 정체성을 형성한다.¹ 일례로 여성 궁수를 다룬 영화 <메리다와 마법의 숲>과 <헝거 게임 : 판엠의 불꽃>이 개봉한 2012년, 미국의 10대 소녀들 사이에서 궁도가 큰 인기를 끌은 바 있다.² 이는 아동 애니메이션이 오락의 기능을 넘어, 아동의 취향과 기호 등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녀물’은 주로 10대 소녀가 주인공이 되어 우정과 꿈을 주제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애니메이션이다. 소녀들은 자신과 공통점이 많은 소녀물의 주인공에게 깊이 공감하고 몰입한다. 특히 변신 소녀물은 변신 장면을 통해 시각적 쾌감을 제공함으로써 소녀 시청자들을 끌어당긴다. 1999년 국내 방영한 애니메이션 <카드캡터 체리>는 최고 시청률 37%를 기록했고,³ 2008년 방영한 <캐릭캐릭 체인지>는 평균 시청률 3.05%로 케이블TV 100개 채널 중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⁴ 아동 애니메이션이 사회의 이상을 전달하는 도구라면, 소녀들은 변신 소녀물을 통해 무엇을 배웠을까?
소녀를 위한 소녀물은 없다
우리의 세계엔 수많은 마법소녀가 존재했다. 검은색부터 분홍색까지 오색찬란한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들은 세계를 가득 채웠다. 그들은 흑과 백으로, 때론 다섯 가지 색으로 나뉘어 변신했다. 한 소녀는 달의 수호를 받았고, 다른 소녀는 고양이가 되어 세상을 구했다. 소녀들은 마법봉을 하늘로 치켜들고 변신 구호를 외쳤다. 신비로운 섬광에 둘러싸인 그들의 치마는 짧아졌고, 몸에는 화려한 장신구가 채워졌다. 그들은 ‘여성적 복장’을 갖춤으로써 비로소 평범한 소녀에서 ‘아름다운’ 전사로 거듭났다.
평범한 소녀는 변신 없이 사랑받을 수 없었다. 일련의 변신 과정 속에서 마법소녀들은 화려한 프릴과 치마, 그리고 하이힐을 얻었다. 강인한 힘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관념 아래서 소년들은 쫄쫄이 하나만으로 영웅이 되었지만, 소녀들은 ‘베이글’⁵이 되어야만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 <베리베리 뮤우뮤우>의 소녀들은 변신을 통해 고양이 귀를 얻고, 특정 신체 부위를 과도하게 부각하는 복장을 갖춘다. <나루토 질풍전 1기>의 나루토 역시 구미호로 변신하지만, 그 과정에서 성적 왜곡은 일어나지 않는다. 로봇메카닉 애니메이션 역시 마찬가지다. 소년들은 로봇과의 결합을 통해 단단한 갑옷과 전투 장비를 갖추는 반면, 소녀물의 소녀들은 “정의롭고 착한 섹시함”을 갖추며 부드럽고 아름답게 변신한다.⁶
소녀의 영웅적 모습은 용기와 당당함뿐만 아니라 섹시함과 화려함, 겸손에서 비롯된다. 마법소녀의 신체를 선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성인 남성 시청자를 끌어오기 위한 전략이기도 한데,⁷ 이러한 전략은 소녀들의 힘을 ‘아름다움’의 부산물로 만들었다. 마법소녀물의 주인공은 ‘아름다운’ 여성의 탈을 쓴 소녀뿐이었으며, 평범한 소녀는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소녀들은 전투와 무관한 ‘아름다움’을 걸친 뒤에야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아동들은 이와 같은 소녀물을 시청함으로써 젠더 차별적인 정체성을 학습했고, 왜곡된 여성상과 성 역할을 강요받았다. 소녀는 언제쯤 있는 모습 그대로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소녀는 영웅이 되었나
▲ (좌) <팅커벨 4 : 날개의 비밀>(2012) 공식 포스터/(우) 동일 작품 장면 캡처. 여성 캐릭터의 체형과 이목구비는 매우 비슷한 반면, 남성 캐릭터는 체형은 물론 얼굴형, 눈썹과 코의 모양 등 외적으로 확연한 차이를 띠고 있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013)에서 엘사는 남성 조력자 없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그리고 엘사의 고난은 안나와의 자매애를 통해 극복된다. 이와 같이 자매애를 근간으로 하는 디즈니 서사의 계보는 팅커벨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애니메이션 <팅커벨 4 : 날개의 비밀>(2012)에서 팅커벨은 동료 요정들과 쌍둥이 자매의 도움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 남성 조력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여성 캐릭터는 분명 아동 애니메이션의 커다란 진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할까?
<팅커벨 4 : 날개의 비밀>(2012)에서 여성 요정들은 하나같이 신체의 곡선을 드러내는 옷을 입고 있으며, 이들을 구별하는 표면적 특징은 머리카락과 복장뿐이다. 이러한 몰개성은 팅커벨의 자매가 여섯 명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이에 반해 남성 요정들은 체격부터 얼굴 생김새, 안경 등의 소품까지 다양하고 개성 있는 외모를 가졌다. 엘사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막대한 권위를 지닌 엘사조차 짙은 화장과 딱 달라붙는 드레스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었다. <겨울왕국>(2013)에서 <겨울왕국 2>(2019)에 이르기까지 그의 몸은 근육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앙상하기만 하다.
반면 2021년 개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엔칸토: 마법의 세계(이하 엔칸토)>에는 다양한 외모의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특히 등장인물 루이사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근육질 체형의 소녀로 그려진다. 그의 근육질 체형은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 구현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디즈니 운영진들은 지금의 모습보다 더 작고 마른 모습의 루이사를 원했기 때문이다.⁸ 디즈니 운영진들은 내재된 힘과 대비되는 겉모습을 통해 그의 능력을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단지 ‘아름다운’ 영웅을 원했던 건 아닐까?
이 질문의 답은 <엔칸토> 상품 시장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루이사 캐릭터 상품의 수요는 공급을 훨씬 넘어섰는데, 이러한 현상이 단순히 루이사의 엄청난 인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애초에 루이사 캐릭터 상품의 공급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⁹ ‘아름다움’에서 벗어난 캐릭터의 상품 수요를 대비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여전히 사회에서 상업적 성공을 이룰 수 있는 캐릭터는 ‘아름다운’ 소녀라 여겨짐을 의미한다.
소녀물은 처음부터 소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소녀물은 사람들의 소비를 더 간편히 이끌어내기 위한 ‘시장세분화’ 전략에서 등장했다.¹⁰ 때문에 소녀물은 꾸준히 가부장적 질서를 답습하고, 그에 순응하는 여성상을 양산해낸다. 안타까운 것은 아동 애니메이션이 아동에게 미치는 영향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향력을 고려해, 아동 애니메이션의 폭력성과 선정성은 법적 처벌과 규제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분법적 젠더 분리와 정체성 왜곡에 대해서는 규제는커녕 논의조차 활발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¹¹ 왜곡된 젠더관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아동은 잘못된 성 인식과 편견을 답습할 가능성이 크다. 아동 애니메이션이 정말 아동을 위한다면, 소녀물이 정말 소녀를 위한다면, 더 다양한 모습의 소녀들이 능동적이고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 모든 소녀는 강인하다. 화려한 여성으로 변신하지 않아도 말이다. 소녀들이 자신의 힘과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는 애니메이션이 필요하다.
소녀를 위한 소녀물이 등장하는 날을 고대하며, 미래의 소녀 영웅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비대칭이고 완벽하지도 않지만, 아름다워.
(It’s not symmetrical or perfect, but it’s beautiful.)
- <엔칸토: 마법의 세계> OST ‘What Else Can I Do?’ 中
¹ 김유나·정은혜, 「여성주의 문화이론에 따른 애니메이션의 여성 영웅 캐릭터 비교 분석」, 『만화애니메이션 연구』,제 36호, 2014
² 스켑틱 협회 편집부, 『한국 스켑틱 Skeptic 2020 Vol.21』, 바다출판사, 2020
³ 윤준필 기자, 「[비즈X웨이브 리뷰] '카드캡터 체리', 그때 그 시절 추억의 마법 소녀」, 『비즈엔터』, 2022.04.24.
⁴ 김지연 기자, 「'캐릭캐릭 체인지', VOD·캐릭터 사업 인기몰이」, 『아이뉴스TV』, 2008.12.29.
⁵ ‘베이비 페이스’와 ‘글래머’의 합성어로, 앳된 얼굴에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가진 여성을 의미한다.
⁶ 김윤아, 「몸 바꾸기 장르(transforming-body genre) 애니메이션 연구」, 『영상문화』, 제15호, 2010
⁷ 백설희·홍수민,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들녘, 2022
⁸ Joel Calfee, 『Disney Fans Are Obsessed with Luisa from ‘Encanto’ But Where’s the Merch?』, 「PureWow」, 2022.01.24.
⁹ 디즈니 공식 온라인 스토어(Diseny shop)에서 판매되고 있는 <엔칸토> 관련 상품은 총 57개다. 그중 루이사가 포함되는 상품은 6개이며, 루이사 캐릭터 단독 상품은 1개에 불과하다.
¹⁰ 시장세분화란 소비자를 선호와 취향별로 나눈 후, 특정 집단에 대해 집중적으로 마케팅 전략을 펼치는 것을 의미한다. (“시장세분화”, 『매일경제용어사전』 , 매경닷컴) 시장이 세분될 경우 마케터들은 소비자를 겨냥하기 쉬워지지만, 소비자들은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서서히 자신이 속한 카테고리에 맞추게 된다. (백설희·홍수민,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들녘, 2022.)
¹¹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의 계획이었던 ‘양성평등 관점에서의 영유아·아동용 문화콘텐츠 생산 가이드라인‘ 제작 및 배포는 지켜지지 않았다. (전혼잎 기자 외 2명, 「"야하게 입어서, 자고로 여자는..." 성교육이 성폭력 비호」, 『한국일보』, 2021.05.04.
참고문헌
김유나·정은혜, 「여성주의 문화이론에 따른 애니메이션의 여성 영웅 캐릭터 비교 분석」, 『만화애니메이션 연구』,제 36호, 2014
김윤아, 「몸 바꾸기 장르(transforming-body genre) 애니메이션 연구」, 『영상문화, 제 15호, 2010
김지연 기자, 「'캐릭캐릭 체인지', VOD·캐릭터 사업 인기몰이」, 『아이뉴스TV』, 2008.12.29.
박인하, 「일본 애니메이션 장르 연구 마법소녀물을 중심으로」, 『한국만화애니메이션 연구』, 3권 0호, 1999
백설희·홍수민,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들녘, 2022
스켑틱 협회 편집부, 『한국 스켑틱 Skeptic 2020 Vol.21』, 바다출판사, 2020
윤준필 기자, 「[비즈X웨이브 리뷰] '카드캡터 체리', 그때 그 시절 추억의 마법 소녀」, 『비즈엔터』, 2022.04.24.
전혼잎 기자 외 2명, 「"야하게 입어서, 자고로 여자는..." 성교육이 성폭력 비호」, 『한국일보』, 2021.05.04.
한혜정, 「프린세스와 못된 소녀」, 『새한영어영문학』, 제 59권 제 1호, 2017
Joel Calfee, 『Disney Fans Are Obsessed with Luisa from ‘Encanto’ But Where’s the Merch?』, 「PureWow」, 2022.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