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근맥교지편집위원회 May 12. 2023

[84호][특집] 더 나은 민주주의

EG


 세계가 혼란하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듯하다. 복지 국가라고 불리던 유럽의 어느 나라들에서는 극우 정당이 입지를 굳히기도 하고, 독립 선언문에서 자유와 평등, 인권을 천명했던 미국도 극심한 사회 분열을 겪는다. 뉴스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도 국제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듯하다. 나아가 곳곳에서는 코로나19와 경기 불황으로 ‘민주주의의 위기’가 찾아왔다고 한다. 물론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현실적인 어려움이나, 죽음과 병에 대한 원초적 공포는 사회를 어지럽게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연대보다는 공격과 분열을 이용해 두려움을 없애려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실질적인 상황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만 남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올바른 해소 방식에 도달하기 어렵게 만든다.

 되돌아갈 길이 없으니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라야 한다는 말은 절망적이다. 어쩌면 현실을 능동적으로 파악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정말 ‘거스를 수 없는’ 위기에 닿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함께 알아볼 차례다.


문제) <보기>에서 다음 네 가지 제시문의 공통점을 찾으시오 (10점) 

<보기>
① “좌파 포퓰리즘 정책의 상징적 사건”1)
② “국민 혈세를 낭비하는 인기영합적 포퓰리즘 정책”2)
③ “경솔한 안보 포퓰리즘”3)
④ “‘포퓰리즘’이라는 허황된 프레임을 씌워 (···)”4)


답) 첫째, ‘포퓰리즘’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둘째, 해당 단어가 의미하는 정책이 무엇인지 (본문에서조차)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셋째, 발화자들은 해당 단어를 통해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상대방에게 공격받았다.


해설) ① 모 정치인이 대형 마트 일요일 휴무제를 두고 한 말이다. ② 현 대통령이 전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문재인 케어)을 두고 한 말이다. ③ 모 정치인이 현 대통령의 핵무장 가능성 언급을 두고 한 말이다. ④ 모 정치인이 출산 시 대출을 탕감해 주는 해외 정책 사례를 소개한 뒤 비난받자 억울함을 호소하며 한 말이다.


 포퓰리즘

 포퓰리즘(populism). 국내외 정세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이 단어는 꽤 익숙하다. SNS에 올라온 짧은 소식을 통해서, 포털 사이트와 뉴스 방송을 통해서 한 번쯤은 접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단어의 의미를 표면적으로만 인식할 뿐이다. 포퓰리즘이라는 단어가 오랜 시간에 걸쳐 사용되어 온 만큼 그 정의 역시 모호하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은 인민, 대중, 민중을 뜻하는 라틴어 포풀루스(populus)에서 유래했다. 여러 형태로 번역되는 어원이 '-ism'과 결합하며 해석과 적용 범주가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포퓰리즘은 '대중이 하는 행동', '대중을 위하는 운동', '대중을 동원하는 체제' 그 어느 것으로도 인식될 수 있다. 현대 정치 무대에서 포퓰리즘은 ‘엘리트적 이데올로기에 반대해 대중의 견해와 바람을 대변하는 정치사상 및 활동’, ‘대중·인기영합주의’,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정략적 단어’ 등으로 이해되지만, 실제 양상은 훨씬 복잡하다. 최근의 '정치가적 포퓰리즘'은 체제의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일정한 정치적 틀 안에서 대중을 동원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려 한다.5) 선거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인은 표를 얻기 위해 분투한다. 오직 표의 개수만으로 당락이 결정되기에 지지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쉽게 유혹당한다. 포퓰리즘과 선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포퓰리즘=반엘리트주의+반다원주의6) 

 독일의 정치학자 얀 베르너 뮐러(Jan Werner Mueller)는 저서 『누가 포퓰리스트인가』에서 포퓰리즘과 포퓰리스트의 명확한 개념을 정의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정치에 관한 특정한 도덕적 상상’이다. 이 도덕적 상상은 정치 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도덕적으로 순수하고 완벽하게 단일한' 국민이 '부패하거나 도덕성이 결여된 엘리트에 대항'한다고 여기는 형태다.7) 포퓰리스트는 자신만이 국민을 대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진정한 국민'의 범주와 그 국민이 소망하는 하나의 공동선을 규정한다.8) 그는 정책을 통해 일정한 공동선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퓰리스트가) 직접 설정한 “이상적인 국민의 의지는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지지자만이 진정한 국민이며, 진정한 국민이라면 그를 지지해야 한다는 논리가 완성된다. 이처럼 포퓰리스트는 도덕적 상상을 토대로 정치적 의제를 펼치며 ‘국민’이 인식하는 정치 방식을 고정한다. 하지만 단일한 국민이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는 허구다.

 주로 언급되는 포퓰리즘의 사례로 브렉시트(Brexit)가 있다. 브렉시트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뜻하는 말로, 당시 보수당 대표였던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의 선거 공약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영국의 EU 잔류에 대한 국민투표를 약속했다.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고 2015년 총선 승리만을 위해 설정한 공약이었다. EU 탈퇴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국민투표를 진행한 결과, 찬성 51.9%로 영국은 유럽연합을 탈퇴하게 되었다. 독립당의 전 대표 나이절 패라지(Nigel Paul Farage)는 브렉시트를 “진정한 국민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유럽연합 탈퇴에 반대한 영국 국민 48.1%는 진정한 국민이 아니라는 의미이다.9) 유럽연합 탈퇴를 주장한 ‘일부’ 국민만이 정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미국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만들겠다"는 말 역시 ‘단일한 국민의 의지’를 상정한다. 트럼프는 최근 몇 년간 국제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포퓰리스트 중 한 명으로, 집권 시기 동안 지지율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을 전략적으로 분열시켰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자기중심적 언행·세계관을 통해 대중적인 지지를 얻어냄으로써, 포퓰리즘의 새로운 형태인 ‘트럼피즘(Trumpism)’을 만들었다. 트럼피즘은 포퓰리즘으로 가장한 트럼프의 파시즘으로, 편 가르기, 반엘리트주의, 언론 탄압 등을 특징으로 한다.10) 개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독재다. 정치인들은 일반적으로 집권이나 지지율을 위해 포퓰리즘을 이용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기존 체제를 부정하고 전체주의적 정치를 기획하는 ‘파시즘적 대중선동’11) 의 양상을 보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버드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는 예일대학교 정치학과 명예교수 후안 린츠(Juan Linz)의 아이디어에서 착안해 만든 ‘잠재적 독재자 감별법 4가지’에 트럼프가 모두 들어맞는다고 주장했다. 이 감별법의 항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민주주의 규범 거부. 트럼프는 두 번의 대선과 재임 기간 내내 민주 규범 파괴를 일삼아 왔다. 부정 선거 주장과 대선 불복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 정치 경쟁자 부정. 트럼프는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의 출생을 문제 삼으며 그가 미국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오바마의 시민권을 부인함으로써 대통령의 정당성을 해치려는 시도였다. 셋째, 폭력 조장과 묵인. 유세 중 시민을 향해 폭언을 내뱉거나 폭력을 부추기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넷째, 언론 및 정치 경쟁자의 기본권 억압.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을 ‘국민의 적’이라고 부르며 지지자들의 집중 공격을 유도했다. 레비츠키는 집권 전후로 이 4가지 징후를 보이는 정치인은 잠재적 독재자일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12) 실제로 트럼프는 군·외교를 정치화하거나 임명권·사면권을 남용하는 등 미국의 ‘대통령 규범’을 훼손했다.13) 이처럼 트럼피즘은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를 무시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뉴욕타임스는 “혐오와 차별, 편 가르기가 통하는 한 트럼피즘은 사라지지 않을 것”14) 이라며 미국의 정치 흐름을 전망했다. 미국 안팎의 전문가들도 트럼피즘의 지속과 영향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수출’된 트럼피즘

ⓒ중앙일보

 트럼피즘은 세계로 뻗어나갔다. 2023년 1월 8일 브라질에서 대선 불복 사태가 일어났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전 대통령 지지자 4천여 명이 10월 대선을 ‘부정 선거’라고 주장하며 입법·사법·행정기관에 난입한 것이다(이하 1·8사태). 이는 지난 2021년에 발생한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사태15) 와 매우 유사하다.

 두 사태는 각 지지자들이 “선거 사기”라는 전 대통령의 주장에 동조해 결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16) 이와 같은 “선거 사기”는 선거 결과를 후보자의 능력이 아닌 제도의 문제로 치부하는 주장이다. 자신의 낙선은 본인의 무능력이 아니라 선거 과정의 부정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지지자의 도덕적 결백을 강조하고 반대파를 악마화함으로써 이념의 양극화를 불러일으킨다.

 전 대통령들의 “선거 사기” 주장이 실질적인 폭력 사태로 이어진 데에는 그들의 발언을 팽창시킨 소셜 미디어와 가짜뉴스, 그리고 언론의 공이 크다.


 

 언론자유수호

 언론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후퇴에 있어 주요한 역할을 맡아 왔다. 언론이 전달하는 소식은 사회 여론을 형성하고 대중이 인식하는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따라서 지배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언론을 장악하고 통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와 같은 언론 통제의 역사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다.

 1971년 3월 26일, 대학생을 주축으로 한 시민 수십 명이 동아일보 건물 앞에서 ‘언론 화형식’을 진행했다. 이들은 신문을 불태우며 말했다. “오늘의 언론은 민중의 지표를 설정하는 지도적 기능은커녕 사실마저 보도하지 않아 보도적 기능까지 몰각해 가고 있다. (···) 권력의 주구, 금력의 시녀가 되어 버린 너 언론을 민족에 대한 반역, 조국에 대한 배신자로 규정하여 전 민중의 이름으로 화형에 처하려 한다.”17) 집권 세력이 원하는 정보만을 전달해 사회 비판 기능을 잃은 언론에 죽음을 선고한 것이다.

 같은 해 4월 15일에는 동아일보 기자들이 양심에 따라 진실을 자유롭게 보도할 것을 결의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한국 언론 최초의 언론자유수호 선언이었다.18) 이 선언은 전국 14개 언론사로 빠르게 번졌다. 나아가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통해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외부 간섭 배제, 기관원 출입 거부, 언론인 불법연행 거부의 3항을 채택했다.19) 실천선언의 파급효과는 엄청났다. 한국일보와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 전국 31개 신문·방송·통신사 기자가 뒤이어 비슷한 내용의 선언문을 내걸었다. 이후 동아일보에서는 야당 관련 기사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사설에서 개헌 문제를 제기하고 민주화 세력의 움직임을 보도했다. 언론의 자유와 함께 민주화의 물결도 불어오는 듯했다. 하지만 곧 유신정권의 주도로 동아일보 광고 해약 사태가 시작되었다. 중앙정보부는 동아일보 광고주들을 소집해 동아일보에 광고를 주지 않겠다는 서약서와 보안 각서에 서명하게 했다. 탄압이 한 달쯤 이어질 무렵에는 기존 동아일보 상품광고의 98%가 사라졌다. 다행히도 자체 보도를 통해 정부의 언론탄압을 알리자 비어 있던 광고란은 격려 광고로 채워졌다. 민주화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자유언론 지지로 표출되었다.

▲ 동아일보에 실린 격려 광고 ⓒ오픈아카이브

 

 언론자유의무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한 현재 사회에서는 모든 일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민주화 시대를 맞은 지금도 언론 통제의 조짐은 자주 목격된다.

▲ 문화방송 뉴스 화면. 문제가 된 부분은 문화방송을 포함한 148개 언론사가 같은 자막을 달아 보도했다. ⓒMBC

 지난 2022년 9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으로 파문이 일었다. 해당 논란은 윤 대통령이 글로벌 펀드 제7차 재정공약 회의를 떠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윤 대통령의 발언에 비속어가 섞여 있던 것이다. 짧은 말이 빠르게 퍼진 데에는 정부의 부적절한 대처가 큰 영향을 끼쳤다. 대통령실은 해당 발언에 대해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축소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관련 내용이 퍼지자 영상기자단에 비보도 요청을 했고, 여당은 논란이 된 발언 영상에 자막을 달아 최초로 보도한 MBC를 명예훼손 등으로 고발했다. 이에 대해 KBS·SBS·YTN·JTBC 등 5개 방송사 기자협회는 “공인 중의 공인인 대통령이 공개된 장소에서 한 발언을 취재 보도한 것이 명예훼손이 될 수 없다”라는 내용으로 공동 성명을 내어 정부의 언론 통제를 비판했다. 그럼에도 대통령실은 2022년 11월 문화방송 취재진을 상대로 대통령 전용기 탑승 불허를 통보했다. “MBC의 외교 관련 왜곡, 편파 보도 반복”이 그 사유였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용되는 대통령 전용기에 언론인의 탑승 여부를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결정한 것은 ‘국정 사유화’의 일종이다. 또 최고권력기구가 특정 언론사를 상대로 압박성 공문을 보내고 형사 고발을 진행하며 취재를 방해하는 행위는 언론 압박·통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언론이 외부 압력을 받을 때, 정치 세력과 느슨하게 연결된 국민은 관련 정보를 교차 검증하기 어렵다. 인터넷이 주요 매개로 자리 잡자 언론은 양극화된 적대 정치를 부르는 최적의 환경이 되었는데, 재생산 비용이 적고 정보를 빠르게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확실하고 편중된 정보가 넘치는 한편 알고리즘으로 비슷한 시각을 가진 주장만을 접하기도 쉽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년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 여론조사 결과, 윤 대통령의 말을 ‘바이든’으로 들은 사람은 약 60%, ‘날리면’으로 들은 사람은 약 30%로 나타났다. 이 수치는 당시 함께 진행한 현 정부의 국정 운영 평가 여론조사 응답과도 비슷했다. 김만권 경희대학교 학술연구교수의 말처럼, “‘사실’ 그 자체를 공유할 수 없는 탈진실의 시대를 현실적으로 확인시키는 사건”인 것이다. 언론은 국가원수의 부적절한 발언을 보도해 국민에게 알렸다. 그러나 이외의 ‘유사’ 언론들은 주요한 정치적 의제를 자신의 수익이나 지지하는 정당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언론은 양극화된 정치 세력이나 국민을 공적으로 연결해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매개체다. 특히 의제를 설정하는 능력은 독보적이다. 사람들에게 일정한 상(像)을 심어주고 실제인 것처럼 믿게 한다. 비록 사실이 아니더라도 일단 언론에 의해 그려지면 이 ‘허위 현실’은 확대·강화된다. 하지만 많은 언론은 정파성을 띠고, 권력이나 상업적 가치에 따라 기삿감과 기삿감이 아닌 것을 구분한다. 이는 대중에게 경향성을 남겨 정보를 정보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정보의 출처, 즉 언론사가 신뢰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필요한’ 정보를 개인의 선호에 따라 규정하고 받아들이는 시대가 도래했다고도 볼 수 있다. 편향적인 정보의 ‘늪’ 속에서 선택은 어려운 일이다.

        

 국민이 하는 정치?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있다. 선거를 통해 이전의 정치가들을 ‘심판’하겠다는 ‘정권 심판론’이다. 정권 심판론이란 집권 정치 세력의 공과에 대해 정확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주 골자는 선거 과정에서 공적보다는 실정에 대한 벌로 현 정권에 표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심판이 아닌 ‘선택’을 하고 싶다.

 제21대 국회의 원내 구성에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의석은 각각 169석, 115석으로 전체 의석의 94.98%를 차지한다. 제19대 국회와 제20대 국회 역시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의 의석 합산이 전체 의석의 80% 이상이었다. 대한민국이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더라도, 실질적으로는 권력의 구성이 단 두 개뿐인 양당제인 셈이다. 이와 같은 양당제 기반의 대의민주주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민주정치를 실현할 수 없다. 개개인의 정치적 지향점을 반영한 정당 선택권은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당 선택권 없는 선거는 곧 유권자의 권리를 빼앗는 것뿐만 아니라, ‘시민이 선출한’ 대표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주권을 행사한다는 대의민주주의의 원리에도 어긋난다.  

▲ 20대 대선 득표율 ⓒ동아일보

 제20대 대통령 선거 주요 득표율은 다음과 같았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48.56%,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47.83%,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2.37%, 그 외 소수당 합산 득표율이 3.61%로 거대 두 당이 96.39%의 표를 가져갔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역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간의 싸움이었다.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강원택 교수는 “정당이 양극화되면서 사회도 양극화됐다. 정당이 둘로 갈라져 자기편을 동원하다 보니 극단적인 목소리가 두 정당을 흔들고 있다.”라며 다당제가 안착할 수 있는 선거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는 양당 체제를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당제가 정국을 어지럽게 한다는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강원택 교수에 따르면 유럽은 극단주의 정당이 나와도 (한국이나 미국처럼) 사회가 양분되지 않는다. 권력을 취하기 위해서는 정당 간 연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당제는 오히려 정치적 혼란을 완화하는 체제인 것이다. 

▲ 2021년 독일 총선 결과 및 역대 총선 정당별 득표율 ⓒ한겨레21

 다당제가 잘 정착한 국가의 예시로는 독일이 있다. 독일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바탕으로 다당제 및 연립 정부(이하 연정)를 통해 내각을 운영한다. 독일에서 연정 구성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전통인데, 독일연방공화국 수립 이후 단일정당 정부가 구성된 적 없을 정도다. 또 연방선거법에는 ‘5% 장벽’ 조항이 있어 연방의회 또는 주 의원 선거에서 정당 후보자 명부에 의해 의석을 배분받으려면 전체 투표자의 5% 이상 득표하거나 3개 이상 지역구에서 당선자를 내야 한다. 이처럼 다당제 아래의 연립 정부는 비례성이 높고 분권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약자와 소수자 등 여러 집단을 충실히 대변하는 정당들이 의회에 포진해 있고 정당들의 합의가 국정에 반영될 수 있다면, 정당 간의 이해관계가 조정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를 이끌 수 있다.

 제21대 국회의원선거를 1년 앞둔 2019년, 선거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며 개정되어 다당제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이 ‘비례대표용 위성정당(비례한국당)’을 창당하며 제21대 국회 또한 거대양당의 독점 구조를 공고히 했다. 지난 대선에서도 다당제를 강조하던 안철수 후보가 돌연 국민의힘과의 단일화 및 합당을 선언하며 다당제의 실현이 좌절되기도 했다. 양당제는 양당이 표를 얻기 위해 서로를 깎아내리는 과정에서 사회 이슈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킨다. 생산성 없는 대립과 갈등은 국민에게 혼란과 분열만을 남긴다. 거대 양당 구조에서 비롯된 싸움은 결국 혐오정치와 정치 양극화를 부를 뿐이다. 양당 독점 구조의 정치가 자연스럽게 국민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낼 수 없는 표

 우리는 후보를 고를 수 있는 권리까지도 잃어가고 있다. 2022년 6월 1일에 치러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1.8:1’이라는 사상 최저치의 평균 경쟁률을 기록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발생한 무투표 당선자는 총 509명으로 지난 20년 이래 최대 규모다. 이는 4년 전 지방선거 무투표 당선자의 5배가 넘는다. 지역별로 보면, 대구 지역 시의원 전체 29명 중 20명이, 경북지역 지역구 도의원 전체 55명 중 17명이 무투표로 당선되는 등 영남에서는 국민의힘 소속 무투표 당선자가 속출했다. 기초의원 비례대표 역시 대구에서는 6명, 경북에서는 15명이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반대로 호남의 무투표 당선자는 대부분 더불어민주당 소속이었다. 전북·광주 지역 시의원과 전남 지역 도의원은 과반에 가까운 무투표 당선자가 나왔고 서울·경기 등 다른 지역 역시 무투표 당선자가 속출했다.

 이처럼 무투표 당선자가 발생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영남·호남 등 지역색이 강한 곳에는 아예 후보자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광주·전남의 광역의원 선거에서는 국민의힘 소속 후보자가 0명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이미 선거 공식이 고착된 지역 구조 속에서 특정 정당의 무투표 당선이 편중되는 것은 사실상 정당의 공천이 선거를 대체하는 것과 진배없다. 

 무투표 선거구는 후보자들의 선거운동마저 금지된다. 무투표 당선이 확정된 후보자의 선거운동을 허용하고 비용을 지원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무투표 당선이 확정된 선거구에서는 병역과 전과 등의 정보가 담긴 선거 공보물도 발송되지 않고, 벽보도 붙지 않는다. 해당 선거구의 유권자들이 후보자의 정보를 찾으려면 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하는 방법뿐이다. 유권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공약이나, 심지어는 후보자의 선거 출마 사실조차 알기 힘들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보자의 자질을 검증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우며 정책 결정 과정에서 주민 의견을 반영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헌법재판소는 비용 절감 등 선거제도의 효율성을 인정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민주주의는 수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      


 민주주의 연구의 세계 석학 아담 쉐보르스키(Adam Przeworski)의 말이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고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을 폭력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이러한 속성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각자의 목표를 좇도록 돕는다. 하지만 2023년의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는 가치’로 바라보고 있을까. 어떤 이들은 나고 자랄 때부터 곁에 있던 민주주의에 너무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삶과 큰 관계가 없다고 여기며 정치 체제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타성에 젖은 정치에서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반면 다른 이들은 자신의 당파성을 표출하며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하지만 민주적 규범은 기억하고 따르는 이가 있을 때 살아 숨 쉰다. 주권은 국민인 우리에게 있으므로, 함께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했으면 한다. 치열하게 헤아린 만큼 민주주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참고문헌
 국립국어원, 「공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n.d., (2023.01.27.).
 권재현, 「[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2>자유언론실천운동과 광고탄압」, 『동아일보』, 2010.11.22. 
 김종성, 「한국 정치는 납득 못할 독일의 괴력」, 『오마이뉴스』, 2021.09.29.
 김현아, 「대선 불복·의회 습격… 트럼피즘, 브라질에 ‘수출’되다[Global Focus]」, 『문화일보』, 2023.01.12.
 대한민국국회, 「정당 및 교섭단체 의석수 현황」, 『열린국회정보』, 2023.02.26., (2023.01.27.)
 로버트 팩스턴, 손명희, 최희영, 「파시즘」, 교양인, 2005.
 박주용, 「(정기여론조사)④국민 58.7% "바이든" 대 29.0% "날리면"」, 『뉴스토마토』, 2022.09.30.
 서영표, 「특집. 포퓰리즘을 다시 생각한다 : 포퓰리즘의 두 가지 해석 -대중영합주의와 민중 민주주의-」, 『민족문화연구』, 63권0호, 2014.
 송윤경, 「문재인 케어가 건강보험 위기 불렀다고?」, 『경향신문』, 2023.01.16.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박세연,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어크로스, 2010.
 안용수, 「"트럼프가 깬 20가지 '대통령 규범'…미국에 장기간 폐해"」, 『연합뉴스』, 2020.11.12.
 얀 베르너 뮐러, 노시내, 「누가 포퓰리스트인가」, 마티, 2017.
 유정인·유설희, 「윤 대통령 ‘핵 보유’ 발언 파장 확산…“대통령이 안보 리스크”」, 『경향신문』, 2023.01.12.
 이민영, 「강원택 서울대 교수 인터뷰 “중대선거구제 반대했지만 입장 바뀌었다...양당제 폐해 없애야”」, 『서울신문』, 2023.01.15.
 이정재, 「“트럼피즘이란 세균이 포퓰리즘의 얼굴로 지구를 덮고 있다”」, 『중앙일보』, 2020.11.24.
 정철운, 「“‘바이든-날리면’ 사태 탈진실 시대 현실 확인하는 사건”」, 『미디어오늘』, 2023.01.13.
 조일준, 「독일 연정 ‘신호등’ 켜지나」, 『한겨레21』, 2021.10.01.
 조현경, 「[6.1 지방선거] 역대 최대 무투표 당선...거대 양당 나눠먹기 횡행」, 『매일일보』, 2022.06.01.
 지성우, 「자유민주주의와 언론의 역할」, 『한반도선진화재단 기타 단행본』, 2018.
 최형원, 「나경원 “제2의 진박감별사가 쥐락펴락”…친윤 “‘제2의 유승민’ 되지 말길”」, 『KBS NEWS』, 2023.01.15.
 최성진, 「국제기자연맹, ‘MBC 고발’에 “윤 대통령, 언론 핑계 삼지 말라”」, 『한겨레』, 2022.09.30.
 최성진, 「“전용기 탑승, 개인 윤석열 시혜로 착각 말라” 언론단체 반발」, 『한겨레』, 2022.11.10.
 허환주, 「홍준표 "대통령 얕보는 사람, 당대표되면 풍비박산난다"」, 『프레시안』, 2023.01.17.

EBS, <아담 쉐보르스키 - 민주주의 난제 5강 무엇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나>, EBS 위대한 수업, GREAT MINDS, 2023.01.10.

















작가의 이전글 [84호] 여는 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