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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맥교지편집위원회 Jul 07. 2023

[84호][여성] 여성

SR

 유구한 여성 위기의 역사 속에서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를 구축해나갔다. 여성의 언어가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페미니즘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세계의 주변으로 밀려난 여성들이 타자의 위치에서 세상을 통찰하고, 한낱 ‘자궁’으로 은폐되었던 ‘여성’을 발굴해내는 변혁적인 시도였다. 하지만 그러한 발굴의 과정에서 페미니즘은 필연적으로 가장 본질적인 질문에 봉착한다.


‘여성’이란 무엇인가?


 여성억압에 저항하는 기나긴 과정에는 수많은 여성의 수많은 페미니즘들(Feminism‘s’)이 있었다. 그리고 ‘페미니즘들’ 사이의 무수한 차이는 곧 ‘여성’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여성이란 무엇인가? 남성의 대립항인가, 혹은 남성의 타자인가? 생물학적 성인가, 사회문화적 성인가? 성의 구분이 여성차별을 심화하는가, 해소하는가? ‘진정한 여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페미니즘의 근간을 뒤흔드는 동시에 장래의 방향을 결정짓는 역설적인 질문 앞에서 여성들은 과연 어떠한 대답을 내놓았을까. 분명한 것은 ‘페미니즘들’이라는 수식만큼 그 대답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했으리라.


 # 남성과 같은 여성

 자유주의1) 가 싹트던 19세기 유럽, 여성 존재에 대한 의문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했다. 여성은 근대적 주체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교육과 법, 노동, 정치, 참정권 등의 영역)를 박탈당함으로써, ‘인간’ 범주에 여성이 해당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자유주의에 따른 평등의식은 곧 여성의 공적 영역에서의 권리보장 요구로 뻗어 나간다. 여성 또한 남성과 같은 이성을 지닌 존재이며, 동등한 교육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성도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 같은 이념은 제1 물결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주요한 움직임이었던 여성 참정권 운동의 기반이 된다.

 그리고 1987년 대한민국, 민주화 항쟁을 기점으로 여성 운동이 부흥하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들은 민주화의 흐름에 따라 권리보장을 위한 치열한 투쟁을 이어나가며 한국 여성 정책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다. 그 결실로 남녀고용평등법, 성폭력처벌법, 여성발전기본법, 남녀차별금지법 등이 제정되고 노동, 교육, 정치, 법 등의 공적 영역에서 여성차별은 법적으로나마 금지되었다.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과거 여성들의 노력 덕분에 현재 대한민국에서 여성들은 남성과 같은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와 일하고, 국회에서 정치도 한다. 이처럼 표면적인 모습만 보자면 성차별은 말끔히 사라진 것만 같다.

 다시 19세기 유럽으로 돌아와 보자. 이 여성들도 마침내 참정권을 획득하지만, 실제 여성들의 삶에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참정권이 보장되어도 여성에게는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정치인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당장 먹고살기 바쁜 여성들의 각박한 삶을 바꾸기엔 부족했다. 참정권 보장만으로는 여성억압을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법과 제도의 평등만으로 여성차별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면, 여성차별은 어디에서 오는가? ‘남성과 동등한 여성’으로서 여성을 정의하는 것은 과연 충분한가?


 # 남성과 다른 여성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이 교육·정치·경제 영역의 권리를 보장받기만 한다면 여성 또한 ‘남성과 같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여성이 공적 영역에서 권리를 보장받는다 하더라도 ‘남성=보편’이라는 기준을 바꾸지 않는 한, 여성은 결국 ‘남성이 되지 못한 여성’으로 남을 뿐이었다. 이는 보편성 원칙에 기초한 평등의식의 한계였다. 여성과 남성의 ‘같음’을 말하는 주장에 한계를 느낀 여성들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가부장 체계 안에서 남성과 다르게 경험하는 일상적 차별을 구조화하고 문제화함으로써, 사적 영역에서의 여성억압을 정치적 의제로 끌어올렸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임을 주장하는 제2 물결 페미니즘, 즉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등장이었다.

 2000년대 초 대한민국 여성 운동은 호주제 폐지라는 목표를 완수하고 암흑기 시절을 맞이한다. 십여 년의 지난한 시간을 보낸 여성 운동은 2015년을 기점으로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일명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젊은 여성들은 여성차별의 현실을 자각하고 불법촬영, 낙태죄, 성폭력, 직장 내 성희롱, 독박육아, 유리천장 등 일상에서 직면하는 개인적인 성차별 경험을 발화하며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해나갔다. ‘여성의 몸’으로 겪은 개별적이고도 공통된 경험과 감각을 함께 공유하며 여성은 그들만의 언어를 만들었다. 남성과의 동등함이 아닌, 남성과의 차이로써 구성된 독자적인 여성 정체성은 ‘자매애’라는 동일시의 감각을 통해 정체성 정치를 펼쳐나갔다. 하나로 집결된 정체성 정치는 뚜렷하고 강력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억압의 근본적인 원인을 가부장제로 보았다. 가부장제의 핵심은 남성이 통제하는 여성의 재생산 능력(임신, 출산, 섹슈얼리티 등)이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재생산과 결부된 ‘여성의 몸’, 즉 섹스(sex)를 논의의 거점으로 삼아 여성해방을 도모했다. 재생산 영역에서 파생되는 공통의 여성억압 경험을 강조하고, 여성들 내부의 차이를 ‘생물학적 여성’으로 봉합하여 단일한 여성 정체성으로부터 정치적 활동을 이어나갔다.


 # 여성과 다른 여성

 백인 중산층 여성을 중심으로 전개된 급진주의 페미니즘엔 커다란 한계가 존재했다. 페미니즘의 물결에 이바지한 흑인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는 억압의 경험을 페미니즘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그 안에서 대표되는 ‘여성’의 경험과 부합하지 않는 여성들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흑인이자 여성인 이들이 겪는 ‘여성’으로서의 경험은 백인 여성의 경험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이 같은 양상은 한국의 사례에 대입해보았을 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4B 운동이 확산했다. 4B 운동이란 비(非)연애, 비(非)섹스, 비(非)결혼, 비(非)출산 운동을 가리키며,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통제하는 가부장제의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4B 운동은 재생산 영역 속 ‘생물학적 여성’의 본질적인 경험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제2 물결 페미니즘의 논리와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억압은 언제나 늘 같은 모습, 같은 방식, 같은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4B 운동 중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비혼’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결혼은 가부장제가 여성을 종속시키는 데 있어 가장 유용한 수단이다. 국가 또한 이성애 가부장 모델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여성의 재생산권을 효과적으로 통제한다. 그러니 비혼을 통해 국가의 기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들의 시도는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가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동성결혼이 법제화되지 않은 한국에서 동성 배우자와 결혼할 수 없는 여성에게 비혼은 애초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지방의 저소득층 여성은 많은 경우 비숙련 서비스직이나 제조업에서 종사하고 있다. 이들은 저임금, 고용 불안정, 성차별적 문화 등으로 인해 결혼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한다.2) 또한, 장애 여성이 시설이나 가족에게서 벗어날 물리적 수단으로써 결혼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장애 여성은 재생산권을 인정받지 못해 자신의 의사가 배제된 임신중단수술을 경험하거나 강요받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여성들의 정체성과 위치는 4B 운동의 목적과 맥락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앞의 예시만 보더라도 단일한 ‘여성’ 개념으로 규정할 수 있는 여성은 어디에도 없다. 인종, 계급, 문화, 성적 지향, 성 정체성, 섹슈얼리티 등의 수많은 정체성과 사회적 범주가 교차하며 각자 다른 맥락과 삶을 만들어낸다. 억압은 정량화할 수 없고, 복잡하며, 다층적이다. 여성 또한 마찬가지다. 여성 간의 수많은 내부적 차이와 다양성이 바로 여성 존재에 대한 정의를 쉽게 내릴 수 없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 만들어지는 여성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랑스 페미니스트 철학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한 말이다. 이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핵심 개념인 ‘젠더’를 암시하는 대표적인 문장이다. 사회문화적 성이라 일컬어지는 ‘젠더’ 개념의 발명은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부여했다. 이제껏 자연화된 여성성이 본질적인 것이 아닌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을 주장함으로써 여성억압을 정당화하는 가부장제의 논리에 대항했다. 하지만 섹스의 불변성에 기초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젠더 논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3) 에 머물러 가부장제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4) 이러한 해부학의 숙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섹스/젠더 체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했다.

 우리는 흔히 여성, 남성의 근거로서 생물학적 요인을 제시하고는 한다. 성기, 성염색체, 성호르몬, 체격, 생식기능 여부 등의 신체적 특징은 섹스를 결정짓는 절대적인 지표로 활용된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성별로 딱 떨어질 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는 자궁과 난소를 갖고 있으나 XY 염색체를 띠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식기와 상관없이 여성 호르몬이 남성 호르몬보다 월등히 많은 사람도 있다. 또 여성으로 살다가 체내에 잠복고환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으며, 생식기가 있어도 생식능력은 없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인간의 몸은 성적 스펙트럼 위에서 수많은 성적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람들의 외관과 말투, 걸음걸이, 태도, 목소리 등의 젠더화된 기호를 통해 그들이 어떤 성기와 성염색체를 가졌는지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한다. 하지만 여성과 남성을 구별하는 확실한 기준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성기, 성염색체, 성호르몬, 생식기능 등 섹스의 근거로 사용되는 생물학적 요인의 절대성은 무엇이며, 이 중 몇 가지를 충족해야 여성, 남성으로 구분 지을 수 있는가? 애초 섹스에 절대적인 기준이 있기는 한 것인가?

 흔히 우리의 몸은 순수한 물질로서 그 자체로 침범할 수 없는 인식의 장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기존 젠더에 대한 논의는 섹스라는 원본이 이미 있고 그를 모방하는 것이 젠더라는 식으로 설명하면서, 불변성을 가진 섹스를 젠더의 토대로 삼는다. 하지만 젠더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섹스는 이미 젠더”라고 이야기하며, 섹스-젠더 체계에 관한 새로운 인식론을 제시한다. 버틀러는 섹스 또한 제도 담론의 산물임을 말하며 섹스와 젠더의 본질 자체를 부정한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 즉 섹스는 반복적이고 의례적인 젠더 수행이 퇴적된 효과로서 생겨난다. 예를 들어 여성을 ‘여성’으로 인식(분류)하게 만드는 담론과 그 속에서 여성이 ‘여성’으로 인식되기 위한 지속적인 젠더 수행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여성’은 물질화·자연화 된다. 한 마디로 섹스는 규범과 담론이 만들어낸 허구인 동시에 규범과 담론으로 인해 허구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본질이 아닌 담론의 효과로 ‘여성’을 인식할 때, 어떤 새로운 시도가 가능할까? 우선 여성의 신체에 개입되는 사회적 힘과 여성을 ‘여성’으로 위치시키는 권력 관계를 분석할 수 있다. 또한, 여성과 생물학 사이의 필연성을 해체하고 여성 내부의 수많은 차이를 포섭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로써 환원될 수 없는 차이와 연결되고, 그 사이를 가로막던 경계를 횡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어떻게 연결되고 횡단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가 남아있다. 바로 지금 제3 물결 페미니즘이 거세게 요동친다.


 # 함께 나아가는 여성

 우리 모두 페미니즘을 처음 만났던 그 날을 떠올려 보자.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왔던 수많은 차별과 폭력, 눈물과 분노 속에서 여성임을 원망하던 순간들, 내 안의 다양성을 설명할 수 없는 갑갑함, 그럼에도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느낀 기쁨과 환희. 이 모든 깨달음은 세상과 불화하는 나의 차이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그 차이에서 시작된 타자와의 만남에서조차 환원될 수 없는 차이를 경험한다. 생각의 차이, 몸의 차이, 환경의 차이, 존재의 차이 등 우리는 당혹스러울 만큼 묶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연결되고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세상과 관점이 대결함으로써 지식이 탄생하고 타자와의 ‘부분적인 연결’5) 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 부분적인 연결이 모이고 모여 세상과 경계를 횡단하는 새로운 페미니즘이 출현한다. 

 

 “여성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의 해답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의 수많은 페미니즘이 있었지만, 여전히 명확한 답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여성에 대한 물음은 결국 여성들에게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를 묻는 과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싶은가? 누구를 만나 사랑할 것이고, 어떤 종류의 행복과 고통을 원하며, 무슨 허무맹랑한 세상을 꿈꾸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각자의 대답처럼, 우리 여성들의 삶과 꿈은 모두 다를 것이다. 다만 당신이 어떤 길을 가기로 했든, 그 모든 교차로에서 당신과 함께 걸어갈 날을 기다린다.


참고문헌

권순정,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통해서 본 ‘젠더’」, 『철학논총』, 2013.

두산백과, 「자유주의」, 『두피디아』, n.d., (2023.01.29.).

로즈마리 퍼트넘 통,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학이시습, 2019.

박동수, 『철학책 독서 모임』, 민음사, 2022.

박수영, 「교차성, 차이로 만나는 페미니스트 정치학」, 『여/성이론』, 2018.

손희정,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휴머니스트, 2020.

심찬희, 「주디스 버틀러의 ‘물질로서의 몸’ 개념」, 『여/성이론』, 2015.

전혜은, 『퀴어 이론 산책하기』, 여이연, 2021.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13.

한국여성연구소, 『젠더와 사회』, 동녘, 2014.


1)  개인의 자유와 자유로운 인격 표현을 중시하는 사상 및 운동으로 사회와 집단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본다. (출처 - 두산백과, 「자유주의」, 『두피디아』, n.d., (2023.01.29.).)

2)  황두영, 『외롭지 않을 권리』, 시사IN북, 2020, (43쪽).

3)  성차가 생물학적 사실로서 고정되어 있거나 결정되어 있다고 여기는 생각.

4)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급진주의 페미니즘 내에서는 여성의 재생산권 탈환을 위해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했다. 기술을 통해 재생산을 외주화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거나, 여성성을 강조하여 재생산 능력을 주체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여성의 신체성이 차별의 근원이라는 가부장제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5)  인류학자 메릴린 스트래선(Marilyn Strathern)의 저서 『부분적인 연결들』에서 제시하는 ‘부분적인 연결’의 개념과 묘사를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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