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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근영 Feb 19. 2017

부탄에서 만난 엄마의 집밥

조금은 불편하고 느린 여행이 알려준 것들



밥솥을 보면 집같이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 솥은 집이고 솥뚜껑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지붕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밥솥을 보면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는 식구들을 위해 정성들여 밥을 지었다. 엄마의 뭉근한 사랑이 밴 집밥이 그립다. 외식이 아무리 화려하고 맛나도 헛헛함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 엄마의 집밥 한 그릇에 속이 훈훈하게 채워지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으리라.


행복을 자랑하는 나라 부탄. 나는 부탄의 집밥이 궁금했다. 부탄여행을 계획하며 집밥을 먹어보기 위해 내가 찾은 묘안은 농가에서 묵는 것이었다. 자유여행이 제한된 나라지만 숙박이나 일정을 미리 현지 여행사와 조율할 수 있다. 인프라 시설이 발달하지 않은 부탄에서는 호텔에 묵으면 편리함은 보장된다. 하지만 스태프를 제외하고는 관광객만 마주칠 게 뻔한 데다 관광객 위주의 식단으로 구성될 호텔 음식이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나는 팜 스테이(farm stay)로 예약을 부탁했다. 농가에서 묵으면 현지인의 생활상을 가까이서 볼 수 있고 호텔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체험이 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샤워시설이나 화장실 등 여러가지가 불편할 수 있을 거라는 여행사의 회신에 내 대답은 간단했다.

“No problem!"

수도인 팀푸에서는 호텔 숙박, 나머지 도시에서는 농가를 선별하여 예약해주겠다는 메일이 왔다. 농가에 전해줄 작은 선물을 준비해서 나는 떠났다.




여행 이틀째 가게된 푸나카. 아열대 기후에 속하는 푸나카는 이모작이 가능한 논농사 지역이다. 높은 산에 둘러싸인 지형 때문에 너른 평야가 아니라 계단식 논이 많다. 푸른 벼와 누렇게 익어서 수확을 앞둔 벼가 조각보를 이어 붙인 듯 조화를 이룬 다랑이논들. 허수아비가 많지 않은 걸 보니 새들에게도 먹을 것을 나눠주는 부탄 사람들의 넉넉함이 느껴졌다.




부탄에서는 손님이 오면 먼저 차를 내온다. 밀크티와 버터티 그리고 쌀과 옥수수를 튀긴 티푸드가 곁들여 나온다. 집에서 기르는 소에서 직접 짠 우유를 넣은 밀크티는 부드럽고 달콤한 반면, 홈메이드 버터로 만든 버터티는 짭조름하다. 취향마다 다르겠지만 식욕을 돋우기에는 버터티가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집 주변을 산책하다 보니 저녁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고 안주인이 손짓을 한다. 저녁을 차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별도로 식탁이 있지는 않았다. 음식을 하는 부엌 바닥에 저녁이 차려졌다. 안주인이 음식을 앞에 두고 앉으면 게스트는 빙 둘러앉는다. 안주인이 접시에 밥을 담아주면 앞에 놓은 음식을 각자 덜어 먹는다. 성찬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요리의 가짓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찰기 없고 푸실푸실한 밥, 고추와 감자를 넣어 끓인 국, 살코기는 거의 없는 돼지 비계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채소와 조린 요리, 치즈를 넣고 익힌 고추요리가 다였다. 손님이 있어서 평소보다 요리를 많이 한 거라고 가이드가 내게 살짝 귀띔했다. 부탄의 소박한 농가에서는 밥과 고추요리만으로 밥을 먹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접시를 받아들고 밥을 먹기 시작하려는 찰나, 전기가 나갔다. 이런 생활이 익숙한 지 안주인이 커다란 초 두 자루를 가져와 불을 붙였다. 그러자 마법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해 보일 수도 있었던 밥상이 갑자기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어둠은 초라함을 삼켰고 촛불은 은은하게 그릇과 음식을 비춰주었다. 음식이 환하게 보이지 않아 시각은 둔해졌지만 혀의 감각은 놀랍도록 예민해졌다.


집에서 만든 치즈와 고추를 익힌 에마 다찌는 매콤함과 고소함이 버무려져 먹을수록 식욕이 돋았다. 고추와 감자로 만든 국은 칼칼하면서도 감칠맛의 여운이 깊었다. 말린 돼지고기 비계는 의외로 느끼하지 않았고 쫄깃한 맛이 별미였다. 이 모든 음식은 찰기 없는 밥과 잘 어울렸다. 씹을 때마다 재료 고유의 맛이 하나씩 느껴지며 입안에서 조화 있게 어우러졌다. 천천히 음미하며 먹다보니 자연히 먹는 속도가 느려졌고 한 숟갈 한 숟갈 먹을 때마다 경탄을 금치 못했다. 호텔식이 부럽지 않은 부탄의 집밥이었다.



접시의 바닥이 드러날 무렵 전기가 들어왔다. 식사가 괜찮았냐고 물어보는 안주인을 향해 나는 양 엄지를 치켜들었고 그녀는 무척 흐뭇해했다. 상을 물린 후 그녀는 ‘아라’를 권했다. 아라는 쌀을 이용해 집에서 담가 먹는 부탄의 전통 술이다. 차게 또는 따뜻하게 데워서 마신다. 그녀는 따끈하게 데운 후 계란을 풀어 내왔다. 꽤 독한 술이라 식후라도 속을 보호하기 위해 계란을 풀었다고 했다. 한 모금 마시고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맛을 더 깊고 세심하게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을 조금 전에 배웠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처음 마셔보는 술이었고 나는 두 잔을 비웠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마무리였다.



모든 게 빨리 돌아가는 한국에 돌아온 후 나의 밥 먹는 속도는 다시 빨라져 간다. 어떤 때는 인스턴트 음식으로 허겁지겁 때우기 바쁘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인데 안타깝다. 바쁘고 빨라지는 만큼 행복에서 멀어지는 걸 느낀다. 여행은 삶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준다. 밥 한 그릇으로도 얼만큼 충만할 수 있는지, 먹는다는 행위를 통해 어떻게 우리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가까이 다가가 체험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집밥에는 한 집의 내력이 들어있고, 식구를 먹여 살리는 세상 모든 엄마의 사랑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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