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운 쿠바 사람들과의 만남, 쿠바 여행기
낯선 여행지에서 사람 구경만큼 흥미진진한 것이 또 있을까. 거의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한국인의 얼굴이 흑백 티브이를 보는 것처럼 단조롭다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는 쿠바인들의 모습은 칼라 티브이 속으로 옮겨간 듯 다채롭다. 도착하는 순간부터 마주하는 형형색색의 모습에 눈이 춤을 추듯 즐겁다.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까지 쿠바는 원주민들이 살던 땅이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이 섬나라는 스페인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1902년까지 4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쿠바는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었다.
스페인 점령 후 쿠바의 원주민들은 사탕수수밭에서 노예로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하기도 하고 전염병이 돌아 대다수가 사라지게 되었다.
원주민의 부족으로 일손이 달리자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쿠바로 수입된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 자료에 따르면 16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약 9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미국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가 약 47만 명이었다고 하니 두 나라 땅의 규모를 비교해보면 숫자의 대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크다.
엄청난 수의 흑인이 유입되고 쿠바의 인종 구성은 참으로 다양해졌다. 다양한 인종 간의 혼혈은 물론 쿠바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스페인의 잔혹한 남미 정복사가 시작되고 유럽인과 아프리카인들이 대거 남미로 이주 또는 유입되면서 발생한 뚜렷한 변화라고 볼 수 있겠다. 어찌 보면 남미의 다양한 혼혈은 원주민 여성과 흑인 여성에 대한 스페인계 백인 남성 정복자들의 지배와 예속의 측면으로도 이해된다.
식민 초기에는 스페인계 백인(에스파뇰),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오)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네그로)의 세 가지 범주로 나뉘었다. 그 이후 메스티조, 파르도, 물라토, 잠보 등 무수히 많은 용어로 인종을 구별하기 시작했고 식민 후기에는 백 가지도 넘는 혼혈의 종류가 하위 범주에 속했다고 한다.
스페인 식민시절, 복잡한 시스템의 인종 계층 체계가 형성되었다. 이 제도는 사회통제를 위해 사용되었고 개인의 사회적 지위까지도 이 체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18세기 스페인 엘리트 계급에 의해 나눠진 인종분류의 계층 체계를 ‘casta 카스타’라고 한다. '카스타’는 이베리아 언어로 ‘혈통'을 의미하며 근대에 들어와서 '계층'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인 ‘caste 카스트'가 파생되었다.
카스타 체계는 출생지, 피부색, 인종, 민족의 종류에 의해 결정되었고 경제적인 환경 및 조세제도를 포함한 모든 삶의 양상에 영향을 미쳤다.
카스타 체계의 주요 인종 분류는 다음과 같다.
- 에스파뇰 : 스페인계 백인. (출생지가 스페인 반도인지 아메리카 대륙인지에 따라 '페닌술라르'와 '크리오요'로 다시 세분됨)
- 인디오 : 아메리카 원주민.
- 카스티조 : 에스파뇰 혈통 3/4과 인디오 혈통 1/4의 혼혈. 즉 백인과 메스티조의 혼혈.
- 메스티조 : 백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 메스티조는 스페인어로 '혼합된'이라는 의미임.
- 파르도 : 백인,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의 혼혈.
- 물라토 : 백인과 아프리카 흑인의 혼혈.
- 잠보 : 아프리카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
- 네그로 : 아프리카 흑인 혈통.
카스타는 피부색이 하얄수록 우월하다고 여겨지고, 피부색이 흰쪽에 속한 사람은 검은 쪽에 속한 사람에 비해 많은 기회와 혜택을 누렸던 인종차별주의 체계였던 것이다.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는 인종차별주의는 종식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인종차별주의의 최악의 형태는 일자리에서 유색의 쿠바인들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했다.
카스트로는 인종차별금지법을 공표하고 대대적인 캠페인을 통해 부유한 백인 쿠바인과 흑인 쿠바인 사이의 계층 격차를 없애려 노력했다.
리서치에 따르면 경제적인 차별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 비해 쿠바는 인종 간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실제로 여행기간 동안 마주친 수많은 쿠바 사람들은 피부색이나 인종과 상관없이 서로 어울려 잘 살아가는 듯 보였다. 스페인계 백인 할머니가 물라토인 손녀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있다든지 메스티조 남자와 물라토 여자 커플이라든지 등의 다양한 조합을 보았는데 아주 자연스러웠다. 어쩌면 이런 구분은 낯선 여행자에게만 신기했을 뿐 그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쿠바를 처음 여행하다 보니 다양한 인종을 마주하는 것이 신기했으나 피와 눈물로 얼룩진 그들의 뼈아픈 역사를 알고 나니 마음이 저렸다.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차별의 상처는 감히 공감할 수 조차 없는 미지의 아픔으로 남았다.
가끔 여행자를 속이려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으나 쿠바는 여자가 여행하기에도 안전한 나라였다. 잘 웃고 낙천적인 쿠바 사람들과 지내며 내 속에 있는 피도 점점 뜨거워지는 듯했다.
사람의 어원은 '살다'에서 왔다고 한다. 삶과 사랑은 또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짧은 여행이었지만 쿠바 사람들의 삶과 사랑은 그들의 다양한 색깔만큼 다채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들의 환한 미소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