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가게 일지 01
아침에 당근이랑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데 린(Lynn)과 린 엄마가 걸어가고 있더라고요. 린 엄마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lekker koud (nice and cold)!"하고 인사했어요. 이게 참, 한국말로 바꾸기가 어려운 네덜란드어 표현 중 하나예요. 이 표현과 반대의 의미를 한국어로 하자면 '더럽게 춥네' 정도 되겠네요. 어떤 느낌을 담고 있는 표현인지 감이 오시죠? 다정한 린 엄마는 우리에게 '진짜 춥지만 좋은 아침이고 마주쳐서 반가워'라고 인사를 한 것이죠.
책가게는 'lekker klein (nice and small)'입니다. 물리적으로 작을 뿐만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최소한의 장치로만 움직이고 있어요. 없는 게 많아요. 지금부터 쭉 읊어볼게요. 책가게가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 짐작하시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책가게에는 독립된 공간이 없어요. 책장 네 개가 나란히 모여있는 거실 한편의 공간이 있기는 한데 '가게'라는 이름에 걸맞은 물리적 공간이 없는 것이 사실이죠. 그래서 책가게가 궁금한 분들이나 공유회원들이 직접 방문해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책을 고를 수는 없어요. 대신 온라인 공간은 있어요. 공유서가의 장서 목록을 책가게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어서 공유회원들은 홈페이지를 통해 책을 고르고 공유신청을 하지요. ('코딩은 푸딩처럼 퍼먹는 건가요' 수준의 IT 상식/흥미/지식/기술을 가진 제가 전자 상거래 플랫폼을 통해 실제로 사용이 가능한(!) 홈페이지를 만들어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요. 다음 기회에 '홈페이지 우여곡절기'도 한 번 써볼게요.)
물리적으로 방문할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 당연히 영업시간도 없어요. 이름이 '책가게'다 보니 진짜 매장이 있는 가게인 줄 아시고 '지금 가면 책 빌릴 수 있나요? 곧 도착해요'하고 기별을 주시는 경우가 아주 가끔 있답니다. 가게도 아니면서 가게라는 이름을 써서 혼란을 드려 죄송할 따름이에요. 다 이름 탓이에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단도직입적으로 '책집', 아니면 길고 자세히 '당근이네 집 거실에 있는 아주 작은 책가게'라고 이름을 바꾸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행정 처리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기에(무서워요) '여기저기 잘 보이게 안내를 해두자'하고 현실과 타협하며 고민을 마치곤 합니다.
책가게에는 넉넉한 서가 공간도 없어요. 그래서 책 후원 문의가 와도 소량의 책만 받거나 마음만 받는 경우가 많아요. 괜히 욕심부려서 데리고 왔는데 제 공간도 만들어 주지 못하고 깨끗이 보살펴 주지 못하면 후원회원께도, 책들에게도 실례니까요. 책 후원 문의를 받을 때는 후원하고자 하는 책들의 권 수와 제목을 정중히 여쭈어 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우선은, 공간적 한계 때문에 제한된 양의 책들만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수 십 권 혹은 수 백 권의 책 후원은 정중히 사양할 수밖에 없지만, 열 권 이하의 책은 (종종) 감사히 받을 수 있어요. 또 하나는, 책가게에 책을 후원해 주시는 것은 공유서가를 큐레이션해 주시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공유라는 목적에 적합한 책 중에 아직 공유서가에 없는 책을 후원받으려고 노력해요. 주겠다고 하는데도 받는 쪽이 참 유난이지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책가게의 상황과 이유를 상세히 설명드리면 유난하다 욕하지 않으시고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더라고요. 아무리 글이나 말에 마음을 조심스레 담더라도 전달 과정에서 뭉텅뭉텅 증발되기 십상인데 그 마음을 가감 없이 받아주시고 상황을 이해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책가게에 없기로 제일 유명한 3종 세트는 가입비, 보증금, 연체료입니다. 공유서가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홈페이지에 가입을 해야 하지만 가입비는 없어요. 가입비가 없는 회원제인 거죠. 가입비가 없는 이유는 굳이 필요가 없어서입니다. 만약 가입비가 부과되면 공유서가가 일종의 '클럽재'가 되는 거잖아요. 그러려면 책가게가 회원에게만 배제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혜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혜택을 제공할 역량도 없고 배제적인 접근은 책가게가 추구하는 존재의 성격에도 상반되거든요. 가입비도 없으면서 굳이 회원제로 운영하는 이유는 통성명이 필요해서입니다. 공유서가를 돌보는 입장에서 책들이 어디에 있는 누구 댁으로 가서 지내고 있는지 최소한의 정보는 알아야 하니까요. (우리 집 애가 어디에 있는 어떤 친구 집에서 놀고 있는지 알아야 하는 부모의 책임감과 비슷한 느낌이죠.) 책들의 행방과 소재를 야무지게 파악하는 것이 책을 보내주신 후원회원과 공유서가를 이용하는 모든 공유회원에 대해 책가게가 갖추어야 하는 예의이자 책임이기도 하고요.
책가게에는 보증금도 없어요. 보증금이 없는 이유도 굳이 필요가 없어서입니다. 통성명했으면 그걸로 일단 보증이 된 거죠. 결국은 금전적 담보가 아니라 사람 보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공유서가는 책을 '읽으려고' 찾는 곳입니다. 그러니 읽는 목적이 달성된 책들은 다시 공유서가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책을 나누어 읽는다는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그 아름다움에 공감하는 분들에게는 그 목적과 공감 자체가 담보가 될 거라고 믿었어요. 현재까지 누계 49명의 책가게 공유회원들이 지난 5년 여의 시간 동안 이 믿음을 완벽히 증명해 주셨어요. 공유되어 나갔던 수백 권의 책들 중에 돌아오지 않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었거든요. (우체국의 배달 사고로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여섯 권의 책이 책가게 역사상 유일한 분실 사건입니다, 흑흑) 바람으로 시작한 믿음이 이제는 경험으로 증명된 단단한 사실이 되었어요.
책가게에는 연체료도 없어요. 연체료가 없는 이유는 '연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공유신청을 하면 최소 30일의 「공유기간」이 생겨요. 기준은 30일인데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배달 지연 등을 고려해서 보통은 30일에 사나흘을 더한 만큼의 기간입니다. 책을 읽는 편안한 기간을 '기한'으로 만들어 '데드라인'을 쳐놓고 '연체'라는 낙인을 찍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저 읽고 싶은 책 몇 권 빌린 것뿐인데 기준일을 좀 넘겼다고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극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요. 일상 속에 얼마나 많은 데드라인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우리를 째려보고 있는지 몰라요. 공유책의 반납일까지 시퍼런 눈깔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미하엘 엔데(Michael Ende)의 소설 《모모(Momo, 1973)》에 세쿤두스 미누티우스 호라(Secundus Minutius Hora)라는 폼나는 라틴어 이름을 가진 박사님이 나오죠. '시분초'라는 이름의 뜻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시간을 돌보는 분이지요. 시간을 사람으로 빚어 놓으면 딱 호라 박사님처럼 나른하고 다정하고 여유로운 눈빛을 가졌을 것 같아요. 눈에 핏대 세우고 날짜가 어긋나기만을 벼르고 있는 '핑크색 가드'가 아니라 호라 박사님처럼 다정한 눈빛으로 돌아오는 책들을 기다리는 '집'이고 싶어요.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약속을 못 지키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반드시 날짜를 어겨버리고 말리라'는 결심으로 반납일을 넘기는 사람이 있을까요. 책가게는 책을 나누면서 이해도 함께 나누는 공간이고 싶어요. 그래서 공유회원들이 반납일에 가까워서 주시는 이메일이나 메시지가 반갑습니다. '공유기간이 더 필요하시면 편하게 연장 신청 해주세요' 하고 말씀드려도 대부분 얼마나 미안해하시는지 몰라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지요. 미리 알려주시고 방법을 물어봐 주시고 책가게가 할 수 있는 대응을 할 기회를 주시니 감사한 일이죠.
(3종 세트로부터의 '옵트-아웃(opt-out)'을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거듭된 고민과 회의와 자문 끝에 내린 결론이었답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는 책가게의 현재 시스템에 안착하게 된 우여곡절기도 다음 기회에 써 볼게요.)
책가게는 lekker klein이지만 ‘더럽게 작은’ 것은 아니... 기를 바랍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는 게 자랑은 아닙니다만 작은 것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며칠 전, 새로 가입하신 공유회원께 메일 한 통을 받았어요. 책가게가 하고 있는 기능이 ‘소중하고 낭만적’이라고 표현해 주시더라고요. 공유회원들께 ‘작고 소중하다’는 토닥임을 종종 받기는 했지만 ‘낭만적’이라는 형용사는 처음이라 한참을 바라보며 되새기며 즐겼네요. 저에게 ‘낭만적’이란, 어둑한 저녁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지나면서 노란불 켜진 남의 집 창문들을 바라볼 때 떠올리는 형용사예요. 아마 네덜란드어가 첫 번째 언어인 사람이었다면 ‘gezelig!’라고 말했지 싶어요. 'Lekker'만큼이나 자주 쓰는 표현인데, 이것도 한국말로 정확히 바꾸기는 어렵지만 무엇이든 쾌적하고 즐겁고 아늑하고 편안하면 'gezelig'입니다. 네덜란드의 유일한 한국책 플랫폼인 책가게가 돌보는 이에게도, 즐기는 이에게도, 지나가며 곁눈질로 구경하는 이에게도 'lekker klein en gezelig'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오게 만드는 공간이면 좋겠어요. 작지만 아늑해서 소중하고 낭만적인 공간이 되도록 오늘도 야무지게 쓸고 닦아 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