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가게 일지 02
당근이의 방학 기간 중에 (저는 방학이 아닐지라도) 하루 날 잡고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이리 읽고 저리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날이에요. 호사를 부리는 날이지요. '도서관'을 뜻하는 네덜란드어 'bibliotheek'와 '날'을 뜻하는 'dag'를 섞어 'bieb-dag'라는 별명을 지어서 부르고 있어요. 시내에 있는 공공 도서관 2층 소파에 앉아 있습니다. 옆에 있는 당근이는 제집 안방처럼 반쯤 드러누워 어린이용 요리책을 읽고 있네요. 책에 나온 레시피를 따라 해 보려는 심산인지 '엄마, 우리 집에 바질 있어? 엄마, 우리 집에 토마토 있어? 엄마, 우리 집에 샬롯 있어?' 하며 끝없이 묻고 있습니다. (당근아, 엄마가 샬롯인지 뭔지는 만져본 적도 없다...) 사실, 오늘 당근이는 《해리 포터》 시리즈를 시작하고 싶었거든요. [8-12세를 위한 서가]의 'Rowling' 섹션을 찾아봤더니 「아즈카반의 죄수」 한 권만 빼고 다 대출 중이더라고요. 그래서 그 옆에 우연히 있던 요리책이 어부지리로 선택을 받아 읽히고 있는 중입니다.
아쉬운 마음에 해리 포터의 첫 번째 이야기 「마법사의 돌」에 예약을 걸었더니 대기 번호가 무려 13번이네요. 기본 대출 기간 21일에다가 우리 앞에 서있는 12명을 곱해보면 최소한 8-9개월은 기다려야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는군요. 우리 도시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서관인데도 최고 인기 시리즈 중 하나인 해리 포터의 재고가 책 별로 하나씩 밖에 없다는 사실이 뜻밖이었어요. 해리 포터 정도면 두세 권쯤 재고를 둘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 의외의 발견이 책가게를 돌보는 입장에서는 솔직히 위로가 좀 되네요. 책가게 공유서가에도 대부분의 책들은 재고가 한 권뿐이거든요. 재고가 한 권뿐인 이유는 가능하면 같은 책을 중복해서 후원받지 '못하는' 공유서가의 한정된 공간에서 비롯합니다. 정해진 공간에 다만 한 권씩만이라도 다양하게 구비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두었거든요. 그런데 공간이 많은 공공 도서관에도 웬만한 책들은 재고가 한 권씩만 있는 것을 보니 공간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책을 파는 목적을 가진 서점이라면 수요에 따라 재고가 열 권도 되고 한 권도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책을 나누어 읽는 목적을 가진 도서관이나 책가게라면 한 권의 재고가 부족함이나 불편함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서가에 딱 한 권뿐인 책을 제일 먼저 찜해서 꺼내 드는 순간의 환희, 읽고 싶은 책 앞에 줄을 서서 기꺼이 차례를 기다리는 설렘, 기다리고 있을 이를 생각해서 날짜 맞춰 책을 돌려놓는 먼저 읽은 이의 배려가 한 권의 책을 나누어 읽는 여정에 보너스로 따라오니까요.
(뜬금없지만) 필립 알스톤(Philip Alston)이라는 국제인권법학자가 'Not-a-Cat Syndrome'이라는 재미있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어요. '고양이 아님 증후군'이라고 번역하니까 되게 귀엽게 들리지만, 사실 별 귀여울 것 없는 국제인권법학 분야의 단어입니다. (국제법/인권법을 이렇게 좀 귀여운 방식으로 연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늘 궁리하는 중입니다) 필립 선생님의 딸이 한 살 반 쯤되었을 때, 토끼, 쥐, 캥거루 등의 동물들을 가리키며 "저건 '안 고양이(not-a-cat)'야"라고 부르더래요. 이 일화에 착안하여 21세기에 들어 국제인권법 체제 하에서 다양화된 행위자들을 '비국가행위자(Non-State actors)'라고 통칭하는 현상을 설명하면서 'Not-a-Cat Syndrome'이라고 표현했어요. 공법의 영역에 속하는 국제인권법의 주체이자 주요 행위자는 전통적으로 항상 '국가(State)'였어요. 하지만 세계화의 영향으로 기업이나 테러집단, 국제기구 등 국가가 아닌 다양한 행위자들이 인권에 미치는 (주로 침해적인) 영향력이 증가하면서 이들 '비전통적' 행위자를 부를 이름이 필요했던 거죠. 【이처럼 소극적(negative)이고 완곡한(euphemistic) 방법으로 국가 외의 행위자를 지칭하는 용어는 결국 이러나저러나 여전히 국제인권법 체제에서 핵심적인 존재는 '국가'이고 그 외의 행위자들은 국가 행위자와의 관계성에 기반해서 정의된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는 의도적인 용어라고 설명을 하고 싶으셨던 필립 선생님의 자세한 글은 책가게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니 생략할게요. (아, 너무 긴 문장... 헉헉)】
필립 선생님의 이야기를 (약간 길게) 한 이유는 (인권법 교과서에서 자주 만날 수 없는 귀여운 용어와 일화라서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고) 무언가의 정체를 정의하기 어려울 때, '나는 무엇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나는 무엇이 아닌가'를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될 때가 있어서입니다. 책가게가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비슷한 선례가 없던 프로젝트여서 익숙한 반례(反例)를 통해 차이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그 정체성을 가장 선명하게 그릴 수 있더라고요. 책가게가 '무엇이 아닌지' 쭉 한번 읊어 보겠습니다.
우선, 책가게는 중고 서점이 아니에요. 공유서가의 대부분은 한때 후원회원의 소장책으로 한 번 이상 읽혔을 책들이지만 중고 가격에 팔릴 목적으로 책가게에 온 것이 아니거든요. 책가게는 헌책방도 아닙니다. '오래되어 성하지 아니하고 낡은 (『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의미의 '헌'이라면 공유서가에 헌책은 없거든요. 후원회원들이 깨끗한 책들만 선별해서 보내주셨거나 책가게에서 직접 새 책이나 깨끗한 중고책을 구입해서 들여놓았어요. 책가게는 책 대여점도 아닙니다. (이전 글에 썼듯이) 가입비/보증금/연체료가 없기 때문에 책가게의 '공유' 시스템은 기존의 '대여' 제도와는 차이가 있어요. 그렇다고 책가게가 도서관인 것도 아니에요. 도서관의 핵심은 높은 접근성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것 또한 이전 글에 썼듯이) 책가게는 자유롭게 방문이 가능한 공간이나 오픈 시간이 없으므로 물리적인 접근성이 매우 낮지요. 그리고 책가게는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비영리라서가 아니라 영리인데도 불구하고 '재산상의 이익'이 발생하지를 않으니 비즈니스라고 부르기에는 자격 미달이라서 그렇습니다. '미(未)영리', 즉 '아직 영리가 아닌'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네요. 수익을 추구하지만 최대 수익을 추구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공격적인 홍보나 프로모션 행사 등을 하지 않습니다. 책가게의 수익 목표는 '홈페이지 유지/관리 비용 등 책가게의 기능 유지를 위한 기본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만큼'입니다. 매년 이 수익 목표만 달성된다면 책가게를 계속 돌보리라 마음먹고 시작했으니까요.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덜란드에서 한글책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존재하기 시작한 곳이거든요.
책가게의 이런 정체성은 서가 구성 방법과 이용 방식에도 녹아 있어요. 공유서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매우 뿌듯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꾸린 서가가 아니거든요. 이상하게 나이가 들수록 힘든 일을 누가 대신 해주겠다고 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 반가운 걸까요.) 여럿이 나눠 읽을 공유서가를, 그 '여럿'이 누가 될지 아무런 단서도 없는 채 꾸려야 하는 어렵고도 어려운 일을 대신 해준 건 씨앗책을 후원해 주신 후원회원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후원회원들은 공유서가의 북큐레이터기도 하죠. 책가게 가족의 역량으로 아무리 다양한 책을 고르고 고른다고 한들 수십 명 후원회원의 다양한 취향과 안목을 대신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래서 씨앗책은 책가게의 가장 중요하고 상징적인 장서 구성 방법입니다. 씨앗책에 비해 비중이 적기는 하지만 책가게가 골라서 들여놓은 책들도 20퍼센트 정도는 됩니다. 주로 ‘스테디셀러’나 신간을 다소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의 책시장과의 ‘시차’를 조금이나마 줄이고자 하는 책가게의 작은 노력입니다. 하지만 판매량이나 출간일과 무관하게 책가게 가족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전공이 반영된 책들도 있고 네덜란드에 계신 독자들의 필요나 흥미를 예상해서 고른 책들도 있지요.
이런 방식으로 구성한 공유서가는 결국 순환과 지속을 목표로 합니다. 책의 내용은 여러 손을 거친다고 해서 그 가치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해요. 책과 그 책을 읽는 사람만 아는 둘 사이의 토론과 대화와 침묵이 갈피마다 스며들어 있을 테니까요. 표지에 때가 묻거나 책장에 손자국이 남거나 모서리가 구겨지더라도 책의 내용과 가치는 낡지도 닳지도 않습니다. 책이 가지는 특별함이죠. 후원회원의 책장 속에서 잠시 기능을 멈추고 있던 책들이 공유서가에 입양되어서 다시 활력을 얻습니다. 활력을 얻은 책들은 멋지게 현역에 재기하여 네덜란드의 독자들에게 위로와 영감과 휴식을 주고 있어요. 이러한 책의 순환을 따라 책가게도 천천히 돌아가고 공유책들의 가치는 점점 짙어진다고 믿어요.
씨앗책으로 태어난 책가게는 태생적으로 책을 읽기 위해 오는 곳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 이유로 공유서가의 책들은 '상품'이 아니며, 따라서 ‘가격’이 아닌 '가치'가 매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공유서가의 모든 책에 동일한 「공유이용료」가 붙어있는 이유입니다. 공유이용료는 개별 책에 대한 비용이라기보다 공유서가 자체를 이용하는 이용료인 셈이죠. 공유서가의 책들은 후원회원이나 책가게가 이미 상품으로써의 시장가치를 지불하고 한 번 구입한 책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는 도서 시장의 상품이 아니라 오로지 '책'으로만 평가되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색이 바랜 낡은 시집에 실린 시 한 편이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기도 하는 반면 비싸고 깨끗한 신간이지만 나의 세계를 흔들어 놓기에는 어림없을 수도 있는 거죠. 책에 대한 평가는 순전히 읽는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어떤 책이 누구에게 공유되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정가, 상태, 분량, 출간일, 인지도, 판매량 등 어떤 지표를 기준으로 해서도 개별 책의 공유이용료를 다르게 매길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은 책가게는 정체성조차도 '그런 것'이 아닌 '아닌 것'으로 정의하는 게 더 쉽군요. 그게 결국 '아주 작은' 책가게의 바탕색인가 봐요. 책가게라는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기획하고 준비하고 시작하고 운영하면서도 이 공간이 이러한 색깔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어요. '책가게야, 너는 커서 이런 공간이 되거라'하며 의도한 바도 아니었을뿐더러 본보기나 참고자료도 없으니 특정 정체성을 의도할 수도 없었거든요. 결국은 지난 시간 동안 책가게가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 정체성을 만들어 냈음을 이 글을 쓰며 새삼 깨닫습니다. 결국은 '사람'이 아닐까 해요. 공유회원에게로 여행을 떠나 함께 지내는 기간 동안 다정한 손길과 눈길을 듬뿍 받은 채 공유서가로 돌아온 책들에게는 생기와 온기가 남아 있습니다. 사람의 생기와 온기가 항상 머물러 있는 책가게는 유기체인 것이죠.
공유서가의 대부분의 책들은 앞선 소유자와 독자가 있었어요. 속표지에 적힌 서명이나 메시지부터 드물게 본문에 밑줄이나 표시가 그려져 있는 책들도 있어요. (책의 속표지에 남겨진 원주인의 메모 중 가장 감탄했던 글은 '또 다 못 읽음'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흔적들을 지울 수 있는 만큼 지워볼까 고민했지만 결국은 그대로 두기로 했어요. 본문을 읽는 데에 문제가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새로 읽는 이와 먼저 읽은 이 사이의 연결 고리가 될 것 같았거든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다리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듯이 책가게도 모두에게 마음 맞는 공간일 수는 없지요. 책을 소장하여 읽거나 원하는 책을 즉시 구해서 읽거나 전자책 읽기를 선호하는 분들에게는 책가게가 불편하고 부족하고 불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종이책이 좋고 기다렸다 천천히 읽어도 괜찮고 책에 남아있는 앞선 독자들의 흔적이 낭만이다 생각하신다면 책가게에 놀러 오세요. 책을 읽는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손에게만 특별히 허락되는 소소하고 예상치 못한 재미를 만나게 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