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예 생산적 헛소리
일주일에 한 번, 친구들과의 그림 모임을 위해 서점을 찾는 후배 J가 있다. 가져온 그림 도구를 하나씩 펼쳐놓으며 모임을 준비하던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이런 질문을 했다.
“너는 인간 조건이 뭐라고 생각해?”
대화의 맥락과는 몹시 동떨어졌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전날 밤을 온통 뜬눈으로 지새우다 해가 뜨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가고도 이렇다 할 답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J는 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황망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이렇게 대답했다.
“언니 나는 기억, 감각, 욕망 이 세 가지가 인간 조건이라고 생각해.”
J는 차례대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말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중 가장 중요한 하나를 꼽자면 세 가지 중 어떤 거야?”
누구는 욕망, 누구는 기억…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생각을 보탰다. 그럼 언니는? 잠시의 소란 끝에 질문은 나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주저 없이 감각이라고 대답했다.
내 기억은 시간에 따라 달리 평가됐고 욕망은 때때로 바뀌어 왔다. 경로를 이탈하면 교통상황을 탐색해 재설정하는 네비게이션처럼, 나는 수시로 내 위치와 상태를 확인해왔다. 나 지금 뭘 하고 있지? 잘 하고 있긴 한가? 근데 이걸 지금 내가 왜 하고 있지? 이런 질문들에 흔들리지 않도록 내 일과 일상을 지탱해온 것들은 언제나,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실감하는 순간들이었다.
여러 책방들로부터 책 입고를 거절당한 뒤 상심하던 차에 ‘생산적 헛소리’라는 상호를 보고 다시 한 번 용기를 내게 됐다던 작가님이 있다. 입고 후 첫 정산을 받고 나서, 누군가 자신의 글을 보고 돈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진귀하고 신기하고 또 감사한 경험’이었다고 말하는 창작자를 만났다. 당신과 같은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을 만나 기쁘다는 출판사 대표님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사장님이 내내 무탈해야 자신의 휴식도 발 들일 곳이 생긴다는 말을 예쁜 엽서에 꾹꾹 눌러 적어 전달한 손님이 있다. 도망칠 곳이 필요할 때 이곳을 찾는다고 고백한 방명록을 읽었다. 무너질 듯 힘들었던 순간에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 나눈 이야기들 덕분에 잘 이겨냈다는 분이 계셨다.
언제까지 이 작고 빛나는 순간들에 기대어 공간을 지킬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임대료는 현실이고 책 파는 일은 돈이 안 된다. 오래 버텨달라는 손님들의 말에, 이전까지는 노력해보겠다고 대답했지만 최근엔 감사하다 말하고 그냥 웃는다.
요즘처럼 한 치 앞을 알 수 없고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어나는 일들로 인해 상황이 급변하는 때에는 가벼운 말로도 함부로 약속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네, 제가 잘 버텨볼게요." 라는 말을 대신해 매일 셔터를 올리고 서점을 환하게 밝힌다. 날짜에 맞추어 일력을 찢고 매일의 기분과 날씨를 생각하며 고른 음악을 틀어둔다. 바닥과 테이블을 닦은 뒤 들쑥날쑥 진열된 책을 책장 끝자락에 맞추어 보기 좋게 정리한다. 내가 더 이상 책방에서의 오늘을 감각할 수 없는 날이 올 때까지 매일같이 할 일이다.
전다예 | 생산적 헛소리
건국대와 세종대의 중간에 위치한 ‘생산적헛소리’는 독립출판과 더불어 큐레이션 가능한 기성출판까지 함께 다루며, 각각의 단점을 보완하고 있는 동네 책방이다. 핸드드립 커피와 음료, 맥주도 판매하고 있으며, 다양한 클래스와 모임을 여는 복합문화공간이기도 하다. 매일 같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던지고 기획하며 헛소리의 가능성을 지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