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은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한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 일상, 새 기준인 ‘뉴 노멀’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 아무도 택하지 않는 일에는 언제나 걱정과 불안함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광진구에는 새로움을 두려움이 아닌 셀렘으로 맞이한 곳이 있다. 바로 ‘21세기자막단’과 ‘프란츠’이다. 영화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저평가된 사람들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새 기준’을 만든 ‘21세기자막단’부터 ‘음악을 모티브로 한 출판·소품 제작을 통해 예술로 가득한 ‘새 일상’을 만들고 있는 ‘프란츠’까지. 남들과는 다른 기준과 방법으로 ‘새 시작’을 하고 있는 두 곳을 만나보자.
먼저 ‘21세기자막단’에 대한 소개 부탁드린다.
‘21세기자막단’은 이름처럼 영화 속 자막을 만드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 영화제 자막팀에서 사회적 기업으로 변신한 최초의 사례로 영화 자막 제작부터 영화제 기획까지, 영상과 관련된 일들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인터뷰를 앞두고 ‘21세기자막단’에 대해 알아보면서, ‘자막가’란 직업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우리처럼 ‘자막가’라는 직업이 생소한 분들을 위해 ‘자막가’에 대한 설명도 부탁드린다.
우리가 흔히 아는 영화 속 자막 한편을 만들려면 크게 자막을 편집하는 ‘자막가’, 번역을 하는 ‘번역가’, 작업이 잘 되었는지 감수하는 ‘감수자’, 그리고 최종적으로 영상의 자막을 입히는 ‘자막 편집자’가 필요하다. 자막을 편집하는 ‘자막가’는 영상을 처음 받았을 때 소리가 뜨고 사라지는 타임코드를 만드는 편집 작업을 주로 한다고 보면 된다. 작업하는 과정이나 일정에 따라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작업하기도 하고, 각기 세부적으로 나누어 일하기도 한다.
흔히 ‘자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자막 한편을 완성하기 위해 정말 많은 작업과 인력이 필요한 것 같다. 본격적으로 ‘21세기자막단’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다. 우선 ‘21세기자막단’을 설립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간단히 말하면 ‘21세기자막단’은 영화제 기술 자막팀에서 근무하던 스태프들이 모여서 만든 회사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영화제 업무를 하게 되면 평균 계약기간이 3~4개월 정도이다. 단기적으로 사람을 고용하는 시스템이라 경력이 아무리 오래된 사람이라도 영화제가 끝나면 일이 없어 실직 상태에 놓이게 된다. 직업 특성상 확정된 미래가 없다 보니 버티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들도 많고. 일례로 ‘21세기자막단’ 창업 당시 내 경력이 12년 정도였는데, 함께 일을 시작했던 사람들 중 남은 사람은 나뿐일 정도였다.
당시 팀장이었던 나는 새로운 일을 찾고 싶어서 그만두려고 했다. 그러다 최소한 후배들이 안정적으로 자기 역량을 계속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은 만들고 그만두자 라는 생각에 계속 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10년 동안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웃음)
‘21세기자막단’을 설립한다고 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어땠나?
정말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시작한 그 해에 예비 사회적 기업이 되는 성과도 이루었다. 영화제에서 먼저 함께 작업하자는 의뢰를 받기도 하고.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영화제 일을 다 뺏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로 들려왔다. 사업자 등록만 했을 뿐인데, ‘자막팀’이라는 자체가 회사로 설립된 사례가 처음이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여러 가지 반응이 공존했던 것 같다.
세상에 모든 일이 다 좋을 수 없는 것 같다. (웃음) 그렇다면 ‘21세기자막단’의 이름으로 작업한 대표적인 작품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21세기자막단’의 경우 국내 영화제나 영화를 국외 영화제로 출품하는 일을 주로해서 대표작이라고 한 작품을 말하긴 어려운 것 같다. 최근 작업 위주로 말씀 드리면 개봉 중인 '나는 보리'라는 독립영화를 작업했고, ‘신과 함께’, ‘리틀 포레스트’, ‘안시성’, ‘창궐’ 등이 있다.
그럼 ‘21세기자막단’의 대표 작품 말고, (웃음) 최근에 진행하고 있는 작업 혹은 활동들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린다.
서울환경영화제의 상영작 자막을 제작 중이고 영화제 스태프 협동조합 ‘단단’을 만드는 데 참여중이다. 협동조합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었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스태프는 조합원이 되어 협동조합에 가입하고 협동조합은 가입된 조합원에게 영화제 일거리를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 영화제 스태프, 즉 인력을 공유하는 플랫폼인 셈이다. 매년 반복되는 불안한 고용 환경에 노출된 스태프들에게 보다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하고 싶어 함께하게 되었다.
매년 반복되는 불안한 고용 환경에 노출된 스태프들에게 보다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하고 싶어 시작하게 되었다.
‘자막가’가 개인적으로 일을 시작하면 자막 편집밖에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회사에 속하게 되면서 ‘자막가’가 다른 일거리를 찾을 수도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영상이나 영화제 기획까지 할 수 있게 되더라. ‘21세기자막단’을 통해 선순환 구조를 보았다. 회사가 되니 이런 이점들이 있는 것 같다. (웃음) 어디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다른 무언가를 해볼까 고민도 하게 되고. (웃음)
사실 ‘영화’하면 누구나 충무로를 먼저 떠올리는데, (웃음) 영화의 거리 충무로가 아닌 광진구에 자리 잡은 이유가 있는지
‘21세기자막단’을 준비하면서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에서 진행하는 ‘사회적 기업자 육성사업’에 지원했었다. 지원 시점과 맞물려 광진구에 사회적기업 창업지원센터가 새로 생겼고, 그 곳에서 ‘21세기자막단’을 위한 창업 공간을 내어주어 광진구에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다른 창업지원센터에 비해 다양하게 공간 활용이 가능하고 창업 멤버들이 모이기 좋은 위치라 선택했다. 업무 특성상 갑자기 인원이 늘었다 줄기도 하고, 밤샘 작업도 하는데 모든 게 가능했다. 센터 옥상에서 정기 상영회를 기획해서 운영했는데 그때 쌓은 경험 덕분에 후에 더 큰 영화제도 기획할 수 있었다.
대화하면 할수록 대표님의 유쾌함에 빠져드는 것 같다. 회사 분위기도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좋다고 생각하는데. (웃음) 확실한 건 우리 직원들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호흡적인 면에서는 잘 맞는 것 같다. 사실 ‘21세기자막단’ 직원들 모두 창업 전부터 함께 해온 식구들이다. 함께한 지 10년이 넘은 스태프도 있고, 프리랜서 번역가 중에는 20년 넘게 함께한 분도 있다. 그렇다 보니 자체적으로 일을 하는 체계가 잘 구축 된 것 같다. 가능하면 의사 결정도 함께 하고, 문제 해결도 함께 하고 있다. 이런 면들을 종합해 봤을 때, 확실히 다른 직장보다는 사람끼리 받는 스트레스는 적지 않을까 싶다. (웃음)
그럼 이제 질문의 포커스를 ‘21세기자막단’에서 ‘자막가’로 넘겨보고자 한다. 대표님에게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데, ‘자막가’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사실 20대 초반, 영화를 만들고 싶었었다.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으로 극장에서 알바를 하며 독립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극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영화를 영화제에 가면 다양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서울다큐멘터리영화제 자원 봉사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자막팀’에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다. 그 후, 영화제 인연이 계속되어 부천영화제 스태프로도 활동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자막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자막가’로서 대표님께서 추천하고 싶은 영화가 있는지
2017년에 개봉했던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를 추천한다. 소소한 느낌의 영화이긴 하지만 그 안에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좋은 집에 살지 않아도 좋은 술을 마시고 싶은 것이 왜 잘못이지?’ 솔직하게 대놓고 표현하는 영화다. 너무 소소해서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사실은 그게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 않나. 과잉되지 않아 부담스럽지도 않고, 요즘같이 집에 있는 날이 많을 때 보기 좋은 영화인 것 같다. 참고로 전고운 감독과는 대학 시절 함께 영화제에서 자막가로 만났었던 인연도 있다. 그래서 추천한 것은 아니다. (웃음)
자막이 좋은 영화를 추천해주실 줄 알았는데 의외의 선택이다. (웃음) 그렇다면, 대표님이 생각하는 자막의 힘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21세기자막단’ 설립 초반에는 “자막은 문화 소통의 다리”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어서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곤 했다. (웃음) 지금은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뛰어넘으면”이라고 말했던 봉준호 감독의 수상 소감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그리고 우리가 관심 갖지 않았을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자막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자막은 문화 소통의 다리
요즘 주위를 둘러보면 해외를 가지 않더라도 다문화 가정을 볼 기회가 많다. 다문화 가정을 보면 가족이지만 함께 영화를 보러 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일상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사람에 따라 읽는 속도가 다르고, 빠르게 지나가는 한글 자막을 읽거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세기자막단’에서는 이를 위해 한글 자막 외에도 중국어, 베트남어 자막을 단 작품들이 있다. 다양한 언어로 자막을 다니 가족 모두 웃으며 영화를 감상하더라. 모국어가 다른 가족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었다. 자막이란 것이 소통의 창구 역할도 하지만 더 나아가 사람에게 더 많은 세상을 배울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 주는 것 같더라.
마지막 질문이다. ‘21세기자막단’ 대표로서 혹은 ‘자막가’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스태프들이 인정받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목표다. 만나는 사람도 늘고, 생각도 많아지다 보니 영화제 스태프들만 인정받는다고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영화제가 바뀌려면 영화계도 바뀌어야 하고, 영화계가 바뀌려면 사회도 바뀌어야 하고. 점점 생각이 많아지고 고민도 깊어진다. 처음 ‘21세기자막단’을 시작했을 때, “왜 굳이 힘들게 회사를 설립하니?”라는 물음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21세기자막단’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곳이 내가 아는 곳만 해도 6곳이다. 느리지만 이 업계에도 조금씩 변화의 바람, ‘새 기준’이 불고 있는 것 같다.
글 최윤아 사진 이기완
· 주소 : 서울 광진구 긴고랑로 41 공유공간나눔 4층
· 홈페이지 : http://21stcentury.co.kr/
· 문의 : 02-454-18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