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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ug 07. 2022

영화 이야기 <캐치 미 이프 유 캔>

이 영화를 금융사기범과 형사의 추격전을 그린 장르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영화의 제목은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 정도가 될 겁니다. 하지만 가정의 파괴로 머물 곳을 잃고 스스로 멈출 수 없는 탈주 중인 소년과 그를 멈추려고 하는 어른의 이야기로 읽는다면 영화의 제목은 이렇게 읽는 것이 맞습니다. ‘나를 붙잡아 주세요’


외관상으로는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린 성장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가족주의입니다. 그리고 이 가족주의는 <패밀리맨>의 것이 아닌 <아메리칸 뷰티>의 것입니다. 1999년에 개봉한 <아메리칸 뷰티>는 미국의 미, 즉 가족주의라는 것이 멀리서 보기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처럼 보여도 가까이서 보면 서로 전혀 맞지 않는 조각들의 슬픈 집합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위 패밀리라고 하는 미국의 가족주의는 이민자와 이민자가 만나 새로운 형태의 집단을 만들고 그 집단이 또 다른 집단을 만나 지금에 이른 미국의 역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름은 말 그대로 ‘Unites’니까요. 다인종 다민족의 수많은 사람들은 시민권을 얻는 순간 모두 미국인이 됩니다. 말하자면 ‘다름’을 ‘하나’로 통합하는 이 포용력과 결속력이 미국의 상징인 셈인데요, <아메리칸 뷰티>가 지적한 것은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다름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 설령 그런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사라졌고 지금은 옛 이야기의 추억과 회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라졌기 때문에 훼손되지 않을 수 있어서 ‘아메리칸 뷰티’인 것이며 바꿔 말하면 이 ‘아메리칸 뷰티’라는 건 지금 없다는 말이지요.


같은 말을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삶의 궤도를 이탈한 것은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을 때입니다. 그리고 원 궤도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다가 마침내 인력을 상실하고 튕겨져서 어딘지 알 수 없는 세상으로 탈주를 시작한 것은 바로 부모님이 이혼한 때입니다. 즉 프랭크가 금융사기범이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가정이 깨졌기 때문이지요.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 영화는 <패밀리맨>에 가깝습니다. 가족을 잃은 자가 어떻게 망가져 가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프랭크는 극중에서 여러 번 아버지를 찾아오고 그때마다 어머니와의 재결합을 암시하는 말을 합니다. 가족의 해체가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지요. 어떤 어른보다도 대범하고 대담한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으면서도 그가 아직 소년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가족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그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녀로 이루어진 미국의 온전한 가정상 속에서 무사히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성인이 되기 위한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했다는 생각이 프랭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여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 생존력이 뛰어난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뒤에 온전한 가족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족이 해체되고 집을 나온 순간 그의 시계는 멈춰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말인즉슨 가족이라는 것은 경제적 보호와 정서적 유대감을 나누는 공동체라든가 최초의 사회 단위이기 이전에 그 구성원의 생을 붙들어두는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가족은 행성이고 가족의 구성원은 위성인 것이지요. 행성이 사라지면 위성은 인력을 상실하고 날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날아간 위성은 스스로 새로운 행성이 되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우주의 폐허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21세기 초반에 소위 결손 가정이라는 불리는 집의 아이들을 대하는 사회의 시선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지요.


하지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랭크의 탈주가 정말 가족의 해체 때문인가. <아메리칸 뷰티>에서 가족을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성적 욕망이었습니다. 배꼽 아래 장미가 놓여진 포스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탄생 이전에 존재하는 미적인 것에 대한 욕망을 말합니다. 이른바 가족이 모든 인간관계의 근간에 위치하는 이유는 바로 그 구성원이 탯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장미는 그 탯줄의 흔적보다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이 말은 가족이라는 제도보다 성적 욕망이라는 본능이 인간의 근간에 위치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에도 배꼽 아래 놓인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장미가 아니라 바로 돈입니다. 프랭크의 어머니는 돈 때문에 아버지와 이혼했고, 프랭크의 아버지는 돈 때문에 탈세를 저질렀습니다. 프랭크의 가족이 해체된 것은 말하자면 돈 때문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돈에 대한 욕망이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가치관보다 더 아래에 위치한 것입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가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방법이란 오로지 더 많은 돈을 모으려고만 하는 프랭크의 의식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프랭크가 집을 나온 뒤 하는 모든 행동은 오로지 돈을 추구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을 모이게 하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돈이라는 것을요.


하지만 <캐치 미 이프 유 캔>이 배꼽 아래 돈을 올려두었다고 해서 <아메리칸 뷰티>처럼 가족이라는 제도의 미적 가치를 과거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가족이라는 제도를 부정하는 대신 오히려 가족의 확장에 대해 말합니다. 이 영화 속에서 아버지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두 사람입니다. 하나는 프랭크의 생부이고 다른 하나는 프랭크를 쫓는 형사 칼(톰 행크스)입니다. 전자가 혈연관계에 의한 제도적 아버지라면 후자는 프랭크를 보호하고 이미 이탈해버린 사회 속에 그의 자리를 새롭게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아버지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상징적인 아버지 칼이 실제로는 가족을 만드는데 실패한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칼은 이혼했고 딸은 재혼한 엄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 역시 아내와 이혼당하고 자식을 잃은 프랭크의 아버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결혼에 실패한 남자나 여자 혹은 부모가 없거나 외부모 아래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가지는 사회의 편견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편견은 대개 그 당사자들로부터 결격 사유를 만들어냄으로써 문제를 개인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이른바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개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선으로 본다면 칼은 자녀를 양육하기에 부적격한 남자입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프랭크를 구원하는 것은 이미 해체되어 버린 가족도, 돈도 아닌 바로 그 부적격자 칼입니다. 그는 모두가 프랭크를 방치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추적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는 박탈감 한가운데 있던 프랭크에게 손을 내밀었고, 해외의 감옥에서 죽음의 위기 속에 있는 그를 구출했으며, 마지막에는 그의 재능을 살려 사회 속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즉 <캐치 이프 유 캔>은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자녀로 이루어진 정형적인 모델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서 발원된다고 말합니다. 프랭크와 칼은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지만 그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어떤 혈연집단보다도 더 가족적인 것입니다.


제도로서의 가족이 아닌 상처 입은 자들의 연대로서의 가족이라는 것은 혈연관계로 맺어진 가족주의의 확장인 동시에 가족이라는 제도의 원형으로 회귀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가족이라는 것은 원래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두 사람의 연대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프랭크와 칼의 연대는 상징적으로 보았을 때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수직적 관계지만 서로가 타인이라는 점에서는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라는 수직관계의 가족 제도를 넘어 좀 더 확장된, 유연한 형태의 가족을 제시하기도 하지요. 프랭크의 탈주는 부모가 해체되면서 가족 또한 해체되어 버리는 수직적 가족제도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사기를 친다는 것은 타인을 통제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캐치 이프 유 캔>은 타인을 통제할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 통제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이 누군가의 통제를 받으면서 온전한 삶으로 회귀한다는 점에서 결국 가족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만 통제라는 것이 과연 그렇게 불편하기만 한 단어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기 행각이 커질수록, 속이는 대상이 늘어날수록 그러니까 얼핏 프랭크의 자유도가 더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프랭크가 얻는 것은 바로 그만큼의 불신이었기 때문이지요. 프랑스에서 칼과 만났을 때 프랭크의 모습은 자기가 찍어내는 수표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마다 칼에게 전화를 했던 것은 아마도 그의 마음 속에서 누군가 나를 붙잡아주길, 이 원치 않는 방황을 끝내주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만약 당신이 나를 붙잡아 줄 수 있다면요.


2022년 7월 13일부터 2022년 7월 24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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