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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ug 28. 2022

영화 이야기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고대 바빌로니아의 다윗 왕이 보석 세공사를 불러서 했던 유명한 주문이 있습니다. 다들 아실 겁니다. 왕은 세공사에게 기뻐도 들뜨지 않고 슬퍼도 가라앉지 않는 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글귀를 각인해 달라고 요청했죠. 그리고 여기서 솔로몬이 알려준 유명한 문구가 나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슬픔도 기쁨도 지나갑니다. 영원한 것도 없고 변치 않는 것도 사라지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죽을 것 같던 고통도 술자리 안줏거리가 되고 평생 단 한 명일 것 같던 인연도 추억이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찬란하다면 언젠가 이 빛나는 영광도 사라진다는 사실이 허무하겠지만 반대로 견딜 수 없는 고통도 사라질 것을 알기에 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궁금해집니다. 만약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생은 어떤 모습을 하게 될까.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한 남자의 괴로운 얼굴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잃은 아들과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버디도 아닙니다. 이 영화의 동력은 올바른 방향을 향해 돌진하는, 오랜 방황 끝에 마침내 답을 찾음으로써 사회를 이탈한 개인을 다시 사회 속으로 끌어당기는 구심력에 있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자연스럽게 원 바깥으로 사라지는 원심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원 밖으로 보낼 수 없는 구심력의 길항에서 동력을 찾습니다. 말하자면 잊히는 것과 잊혀서는 안 되는 것이 충돌하는 것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리(케이시 에플렉)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겪고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떠나 보스턴에서 건물 잡역부로 살고 있습니다. 원래 직업인 조업을 그만두고 타지에서 사람들이 가장 멸시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때로는 공격적이고 난폭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타인의 멸시와 무관심 속에 가둬두기 위해서인 것이죠.


리의 아내인 랜디(미셀 윌리엄스)는 이미 재혼했고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리와 랜디를 고통의 중심으로 몰아넣었던 그 문제는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지만 적어도 랜디는 그 고통의 반경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겠지요. 말하자면 충격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지났는데도 리는 여전히 고통의 반경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스스로의 의지로요.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던지는 윤리적인 질문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인간은 언젠가 모든 것을 잊고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가 아니면 죄책감을 떨쳐버려서는 안 되는 것인가.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나에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고통을 준 상대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태연하게 나에게 다가온다면.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아니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상대가 만약 나라면.


리에게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영화의 이야기는 바로 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시련이자 기회로부터 시작합니다.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고향을 찾은 리는 형이 자신에게 조카의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리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이 떳떳한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런 리에게 후견인이 된다는 것은 한 번 실패한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 맡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한 번 실패했던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삶의 동력을 상실한 인간이 똑같은 문제와 조우하여 다시 방향을 찾고 더 나은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서사는 많습니다. 이때 문제는 윤리적인 것이기보다 극복해야 할 장애물에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서사에서 문제는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할 시련 이상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리는 말합니다. “더 못 버티겠어.” 말하자면 그는 다시 한번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리라는 인간이 나약하고 과민하기 때문이 아니라 외려 윤리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리는 자신의 문제를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안고 가야 할 윤리적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제목인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실제 지명이며 이름 그대로 바다와 땅이 맞붙은 항구입니다. 바다는 항상 똑같아 보여도 오늘의 바다는 어제의 바다가 아닙니다. 물은 흘러서 사라지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땅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해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바다가 시간이라면 땅은 인간인 것입니다. 오늘의 바다는 어제의 바다가 아니지만 그것이 같은 바다처럼 보이는 것은 시간은 어제와 내일이 달라도 우리는 언제나 오늘을 살기 때문이며, 인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지만 그 모든 모습은 나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리입니다. 그를 괴롭게 만드는 고통의 바다는 이미 흘러가 버렸지만 여전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새로운 바다가 아니라 고통의 바다입니다. 반대로 죄책감에 휩싸여 예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여도 그의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조카와 바다 위에서 장난치던 과거의 자신입니다. 이른바 그는 이미 사라진 것을 붙잡고 변하지 않은 것을 모른 체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을 외면하는 것은 죽은 자에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말하자면 리는 경찰서에서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을 때 이미 상징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의 머리를 관통한 것은 총알이 아니라 죄의식이었던 것이지요.


죄의식에 휩싸여 스스로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리의 모습은 그 원인이 되는 사건이 공개된 후부터 관객의 공감을 사게 됩니다. 말하자면 영화는 죄의식을 윤리적인 것으로 그리고 있고 그 죄의식을 수행하는 리의 모습을 일종의 순교자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은 날 여자 친구를 불러서 동침하고 새로운 여자 친구와 어떻게든 잘 생각만 하고 있는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의 모습은 철이 없고 부도덕한 것으로 비치지요. 


그러나 이 영화는 죄의식 자체를 윤리적인 것으로 그리고 있을지언정 과거에 매여 있는 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냉동닭을 보고 패트릭이 울음을 터뜨리는 이유는 그것이 냉동되어 있는 아버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땅 밑으로 사라지지 않고 얼어붙은 채 정지해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시간의 멈춤이 비윤리적인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이것은 딜레마입니다. 흘러가는 것을 붙잡고 있는 것도 흘러가는 것을 흘러가게 두는 것도 모두 윤리적이면서 비윤리적이라면 인간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영화는 여기에 어떤 답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영화의 말미에 리가 집을 구할 때 패트릭이 올 수 있는 방을 만들어 두겠다는 것은 그가 과거를 극복하고 아버지로서의 위치를 복원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후견인을 맡았겠지요. 영화는 제목 그대로 바다와 땅이 붙어 있는, 말하자면 흘러가는 것과 흘러가지 않는 것이 공존하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가령 리의 경우가 흘러가는 것을 모두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면 패트릭은 흘러가는 것을 모두 놓아주고 새로운 시간을 받아들이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죄의식의 윤리로만 작동하는 것도 아니고 순리의 윤리로만 작동하는 것도 아닙니다. 역행과 순행이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라서 인간은 먼 곳을 쳐다보며 멈추었다가 갈 길을 보며 걸음을 옮기기도 하는 것이지요. 즉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답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세상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세상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모순적으로 관객과 공감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바다에만 있거나 땅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바다와 땅 사이에 머무른 배 위에 있지요. 흘러가는 것과 흘러가지 않는 것 사이에서 흔들리면서 사람은 그렇게 자기가 아닌 방향을 쳐다보게 됩니다. 땅은 언제나 바다와 붙어 있습니다. 



2022년 7월 25일부터 2022년 8월 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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