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Jul 24. 2022

영화 이야기 <어 퍼펙트 데이>

이런 비유가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영화를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면 <어 퍼펙트 데이>는 제가 이제까지 봐온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제목만 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지만 이 영화의 배경은 보스니아 내전입니다. 20세기에 벌어진 가장 끔찍한 전쟁 중 하나로 인종이나 종교적 이유로 인한 학살과 부녀자 겁탈 등 온갖 전쟁 범죄가 일어났죠. 심지어 전쟁이 벌어진 시기는 1990년대입니다. 말하자면 광기에 휩쓸려서 인간을 죽이고 강간하고 약탈하는 일이 불과 30년 전에 문명의 첨단이라 불리는 유럽에서 태연히 자행되었던 겁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지만 짐승이 될 수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크라이나에서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일은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만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영화 <어 퍼펙트 데이>는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의 시작은 1995년이고 이때는 주인공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 전쟁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 유엔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전쟁 고발이 목적이었다면 영화의 시작을 1년만 앞당겼어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쟁이 끝난 후에 시작합니다. 영화는 그 이유를 바로 첫 장면에서 명쾌하게 보여줍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물 속에서 죽은 시체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위생학을 전공하지 않았어도 시체가 잠겨 있는 고인물을 마시면 몸에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총성이 멎었다고 해서 물을 마실 수 있는 건 아닌 것입니다. <어 퍼펙트 데이>가 이 장면부터 출발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전쟁이 끝났다고 일상이 돌아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게 아닌 것처럼 전쟁이 끝났다고 하여 죽음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시체를 치우는 일은 삶으로부터 죽음을 떨어뜨려 놓는 일입니다. 누구도 묘지 옆에서 살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저만치 가 있어야 삶은 비로소 이쪽으로 올 수 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영화는 유엔군이 있는 저곳이 아니라 시체가 있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비유하면 전쟁은 피하고 싶은 것 혹은 싫은 것이 될 겁니다. 뭐 누구는 전쟁 영웅이 되는 상상을 하면서 기대할지도 모르지만 대개는 전쟁이란 말에서 불길한 것 혹은 끔찍한 것들을 감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배경은 1995년, 즉 전쟁이 막 끝난 뒤입니다. 말하자면 끔찍한 일은 인생을 피해 간 것이 아니라 이미 관통했습니다. 문제는 관통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화를 사람에 비유하면 <어 퍼펙트 데이>는 인생에 가장 끔찍한 일을 겪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인 것입니다. 이 영화가 제목에 닿기까지 얼마만큼의 괴리를 품고 있는지 이제 실감이 조금 나실까요. 영화 <어 퍼펙트 데이>는 반어법이 아니라면 불가능에 도전하는 영화입니다. 누구도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을 겪은 직후에 “완벽한 날이야”라고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영화에 기적이나 이변 같은 건 없습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연상시키는 극적 사건의 돌출과 해결도 없고 더 큰 사건이 나타나 작은 사건을 잡아먹는, 그리하여 큰 사건이 해결되면 작은 사건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뉘앙스의 결말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의 문제로 시작되었던 일이 연달아 다른 문제를 불러오면서 문제는 한 번에 해결해야 할 큰 사건이 아닌 각각 해결해야 할 작은 사건의 연쇄로 커집니다. 말하자면 눈덩이가 아닌 모래 알갱이인 셈이지요. 그리고 영화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이 중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적어도 인간의 힘으로 해결되는 것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완벽한 날”에 닿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문제를 바라보는 이 영화의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 보여주는 것은 시체, 즉 문제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체가 관객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시체를 바깥에서 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시체를 우물에 넣어두고 위에서 내려보는 시점으로 시작하는 대신 우물 바닥에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가라앉아 있을 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주했을 때 비로소 정확한 정체를 목도할 수 있다는 것. 이 말은 문제와 대면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말도 됩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자동차에 밧줄을 연결해 시체를 끌어올리는 이 장면은 명확히 두 지점으로 분할됩니다. 하나는 시체가 올라오고 있는 어둡고 습한 우물 속이고 다른 하나는 흥겨운 음악이 들리는 차량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는 사람들이 산개한 밝은 바깥입니다. 이 둘은 얼핏 대조적인 세계로 보이지만 사실은 연결된 세계입니다. 차량이 시체를 밧줄로 묶어서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에 차량 안에서 흥겨운 노래를 틀 수도 있고 물을 뜨기 위해 사람들은 기다릴 수도, 기다리는 동안 농담을 주고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시체가 우물 속에 그대로 있었다면 우물 옆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겠지요. 


우물은 원래 어둡고 바깥은 원래 환합니다. 시체가 없다고 우물이 밝아지는 것도 아니고 시체가 있다고 바깥이 어두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물에 시체가 계속 잠겨있다면 거기에는 아무도 없겠지요. 중요한 건은 빛의 유무가 아닙니다. 빛은 단지 보여줄 뿐입니다. 아무도 없고 환한 바깥이라면 빛이 보여준 것은 그곳이 공동이라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문제를 방치할 경우 그곳은 아무도 오지 않는 공동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비유하면 누구의 접근도 불허하는 마음의 상처가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에 줄을 연결하고 그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려고 할 때만이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해결된 뒤에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문제에 줄을 묶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문제와 삶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아무 문제도 없는 삶이라는 것은 어쩌면 수많은 문제를 방치해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죠. 그러나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이 영화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점점 더 늘어납니다. 그런데 문제가 점점 더 늘어난다는 것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모른 체하지 않는 것들이 늘어난다는 것이죠.


이 영화가 첫 장면에서 보여주는 것은 문제와 삶의 이분법적 분리가 아니라 문제와 삶의 연관성 그 자체입니다. 문제는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니라 모른 체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것. 삶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그다음 문제를 해결하는 이른바 게임의 레벨업이 아니라 이 문제와 연관되고 저 문제와 연관되면서 문제가 삶 그 자체임을 깨달아가는 거라고 <어 퍼펙트 데이>는 말하는 것이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물에 사람들이 모인 것은 그 속에 있는 시체(문제)와 자동차(해결하려는 의지)가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상처 하나 없는 영혼은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상처 입은 영혼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상처 입은 영혼들 속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상처 입은 것은 너만이 아니라고 설득할 수 있는 사람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길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지요. 서두에 가장 닮고 싶은 영화로 <어 퍼펙트 데이>를 꼽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첫 장면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니 이제 영화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맘브루(베네치오 델 토로)는 ‘국경 없는 원조회’의 안전 담당자입니다. 물에 빠진 시체가 너무 무거워서 가지고 있던 밧줄이 끊어져 버리자 할 수 없이 맘브루는 밧줄을 찾으러 가게 됩니다. 그러던 중 공을 가지고 도망치는 소년 니콜라를 차로 치게 되고 니콜라는 자기를 쫓아온 아이들에게 공을 빼앗기게 되지요. 니콜라는 항의하지만 맘브루는 니콜라에게 공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하고 차에 태웁니다. 왜냐하면 공을 빼앗은 아이가 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배경은 1995년으로 내전은 이미 종결되었고 곳곳에 보이는 유엔은 평화 협정을 준비하기 위해 도착한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식수를 공급하는 세 개의 우물 중 두 개에 지뢰가 깔려 있고 도로 곳곳에 죽은 소로 위장한 지뢰가 설치된 이곳은 여전히 전쟁 중입니다. 니콜라가 공을 빼앗기는 장면에서만 봐도 그것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요. 니콜라에게서 공을 빼앗은 아이는 기껏해야 8살이나 9살 정도로 보이는데 실탄이 장착된 총을 꺼내어 맘브루를 위협합니다. 


아이는 그 아이가 속한 사회의 가장 적나라한 반영입니다. 아이가 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사회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바로 알려줍니다. 전쟁이 사람들의 영혼을 깊숙이 침탈하면 일상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도 삶의 방식과 전쟁의 방식을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상식적인 사회에서 공을 갖기 위해 총을 들이대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 중인 사회라면 공이 아니라 무엇이든 총을 들이대고 가져가죠. 1995년에 군대와 군대가 격돌하는 전쟁은 끝났는지 몰라도 사람들의 생활은 아직 일상이 아닌 전쟁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이 사람에게 남긴 상흔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이 상황을 개인으로 비유한다면 견딜 수 없는 사건을 겪은 후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건은 이미 자신을 관통해 지나갔지만 그 사건의 여파는 몸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 지뢰처럼 보이지는 않아도 한 번 터지면 스스로 회복이 불가능한 장애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보스니아 내전 후 이 지역 사회와 사람들은 말하자면 불안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맘브루 일행이 찾는 것이 밧줄과 공이라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우선 이 둘은 아주 소소한 것입니다. 흔하고 찾기 쉽고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밧줄과 공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B(팀 로빈스)가 찾은 가게에는 얼마든지 밧줄을 구할 수 있었죠. 하지만 가지고 나올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를 두고 가게 주인은 “교수형”이라고 하지요. 총을 가진 쪽이 빼앗아 달아난 공처럼 밧줄 역시 가해자가 쥐고 있기 때문에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밧줄은 극과 극의 용도로 사용됩니다. 한편에는 사람을 매달아 죽이는 죽음의 용도인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우물 속에 있는 시체를 건져냄으로써 식수를 공급하는 생명의 용도로 쓰입니다. 영화는 보스니아인 편을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브리아인 편을 드는 것도 아니지만요. 단지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어서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지금 밧줄을 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가해자들이지요. 말하자면 밧줄을 관장하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 죽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밧줄을 구하려는 맘브루 일행의 여정은 어떻게 생각하면 보스니아 전역을 물들인 죽음의 기운으로부터 삶의 기운을 되찾아오는 여정이기도 한 셈입니다. 니콜라의 부모를 죽인 밧줄을 풀어 우물 속에 있는 시체를 건져내는 것은 죽음의 도구를 생명의 도구로 전환시킴으로써 끝없이 인간을 죽이고 미워하는 전쟁의 광기로부터 삶을 건져 올리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말하자면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전쟁은 언제나 삶 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전쟁을 끝내는 것은 바로 죽음이지요.


대립적으로 보이는 두 개의 성질이 확실한 경계를 이루는 대신 서로 묶여 있다는 생각은 <어 퍼펙트 데이>를 이끌어 나가는 기조이기도 합니다. 우물 속 죽음과 우물 바깥의 삶이 묶여 있고 교수형을 집행하는 데 사용된 밧줄이 식수를 공급하기 위한 밧줄로 바뀝니다. 이 영화는 어디에서나 삶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어디에나 삶도 죽음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죽음으로부터 찾아온 생명의 기운을 잘라내는 것이 가해자가 아닌 유엔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니콜라의 부모를 죽인 밧줄로 우물 속 시체를 끌어내던 맘브루 일행은 유엔에 의해 제지당합니다. 이유는 바로 그것이 불법이라는 거지요. 유엔 측 담당자는 시체를 꺼내기 위해서는 판사가 동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진짜 적이 누군지 알게 됩니다. 이 영화는 최고 악당의 자리에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밧줄을 팔 수 없다던 가게 주인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놓인 것은 바로 이념인 것입니다.


우물에서 시체를 꺼내는 일은 말하자면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물에 시체를 집어넣은 것은 당연히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함으로써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그 누군가가 기독교인이거나 불교인이거나 이슬람인이기 때문일 것이고 피부색이 달라서 일수도 있으며 어제 우리 가족을 죽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이 죽음의 근간은 바로 종교나 인종 같은 이념적 산물에 기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념이라는 것은 종교나 인종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유엔이 집행하고 있는 일. 규정과 평화협정에 의거한 그 양식 역시 법치주의라는 이념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영화 속에서 나온 모든 것 중에서 인간을 살리는 유일한 것은 바로 인간이 만들지 않은 물과 인간이 낳지 않은 소뿐입니다. 반대로 이념이나 총, 밧줄 같은 것은 끊임없이 인간을 죽이는 데 사용되고 있지요. 영화는 조금 더 확장한다면 자연은 인간을 죽이지 않는다. 오직 인간이 만든 것만이 인간을 죽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맘브루 일행이 고생해서 가져온 공을 니콜라는 10달러를 받고 팔아버리죠. 그 이유는 물론 부모를 보러 가기 위해서지만 중요한 것은 부모를 만나기 위한 수단으로써 ‘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니콜라의 말로 표현하자면 “여기서는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라는 것. 말하자면 인종과 종교 그리고 전쟁 이후에 다가오는 것은 바로 자본인 것이지요. 어쩌면 상황은 더 악화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릴 수 없는 것은 비록 마음을 돈과 바꾸어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맘브루는 숨겨놓은 100달러를 니콜라에게 건네면서 말합니다. “조건이 있어. 꼭 할아버지와 함께 가야 해.” 이 영화는 정말 버릴 장면이 없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바로 이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맘브루는 100달러로 니콜라의 마음을 그리고 할아버지와 같이 가야 한다는 조건으로 니콜라의 목숨을 지킨 것입니다. 예전에 이동진 평론가는 <그랜 토리노>의 네이버 한줄평에 “이것이 어른의 영화”라고 썼지요. 같은 말을 이 장면에서도 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른의 태도입니다.


인간이 만든 것들이 인간을 위협한다는 사고는 영화의 말미에 우물에서 시체를 꺼내는 것이 결국 그 누구도 아닌 비라는 것으로 정점을 찍습니다. 이 비는 “비만 안 오면 괜찮을 거야”라는 B의 말이 끝난 직후에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맘브루 일행은 지금 난민 캠프의 화장실을 고치러 가는 중입니다. 비는 도덕적이지 않습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그냥 내립니다. 자연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해가 없습니다. 비는 난민캠프에도 맘브루 일행의 머리 위에도 밧줄 가게 위에도 그리고 우물에도 내리지요. 비로 인해 가해자가 단죄받은 것도 없고 피해자가 보상받은 것도 없습니다.(우물에서 시체는 나오지만 난민 캠프의 화장실은 엉망이 됩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인간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영화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 속에서 일어난 모든 비극은 바로 인간이 인간을 자연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바로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누구의 탓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죠. 유엔의 법치주의라는 것은 결국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며, 피해자와 가해자가 나뉘는 것은 바로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밧줄 가게 주인이 밧줄을 팔지 않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우물에 빠져 죽을 사람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그는 얘기하죠. 이것을 확장하면 전쟁이 됩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결국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할 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오다 에이치로의 <원피스>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도필라밍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의는 이긴다고? 이기는 게 정의다.” 이 말이 설득력을 가진 이유는 이렇습니다. 바로 이긴 쪽이 진 쪽에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인간을 자연 대하듯 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난민 캠프로 향하는 차 안에서 소피(멜라니 티에리)는 말합니다. “완벽한 날이네요.” 그러나 오늘은 완벽한 날이 아니었습니다. 우물 속 시체를 꺼내기 위해 사방팔방을 돌아다녔지만 결국 시체를 꺼내는데 실패했고 교수형 당한 부모와 혼자 남은 아이를 지켜봐야 했으며 가는 곳마다 거절당해야 했고 이제는 쉴 틈도 없이 다른 임무를 하러 가야 합니다. 완벽한 날이기는커녕 최악의 날인 거죠. 그래서 소피의 ‘완벽한 날’은 얼핏 반어로 들립니다.


하지만 이 ‘완벽한 날’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최악의 날에는 보통 탓할 인간도 많은 법입니다. 하지만 소피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날(Day)입니다. 이것은 그녀가 오늘의 불행을 누군가의 탓으로 전가하는 대신 자연적인 흐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이라는 것. 반대로 말하면 오늘이 오늘이 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것이죠. 하여 모든 것이 실패하고 세계의 불행은 사라지지 않아도 오늘은 반어나 조롱 없이 진정한 ‘완벽한 날’에 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어 퍼펙트 데이>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비극적인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물에는 시체가 빠져 있고 사람들은 돈을 주고 물을 구하며 부모는 이웃에 의해 교수형 당하고 아이는 어른들을 배반합니다. 거기에 정의의 사도처럼 보이는 주인공들은 모조리 실패만 하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유쾌함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영화 내내 이야기 속으로 파고드는 유머 감각과 이야기의 불행한 기운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차단하는 흥겨운 음악 덕분입니다. 이 유머와 음악은 아무리 불행한 일도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뉘앙스가 된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바로 그 음악과 유머를 견지하기 위해 지녀야 할 태도입니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장영희 교수는 유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군가 무슨 일을 할 때 상황의 정곡을 찔러 유머 감각을 발휘하여 대처한다는 것은 그의 날카로운 상황 판단력과 자신의 의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전제로 한다. 이는 또한 근시안적 판단을 유보하고 한 발자국 물러서서 좀 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관찰할 수 있는 여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의 믿음에 관한 확신, 그리고 그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는 정직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유머란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한 신념 위에서만 발휘된다는 것. 자연이라는 대명제에 얼핏 가려져 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끝없는 운명의 거절 앞에서도 다른 방향을 찾아 액셀을 밟은 맘브루 일행의 신념입니다. 그것은 이념을 떠나 사람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고 공과 부모를 빼앗긴 아이에게 공과 부모를 지켜주는 일이지요. 말하자면 그들은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를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죽은 부모를 보고 괴로워하는 소피에게 맘브루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건 없어. 그냥 가는 거야. 그러면 언젠가는 집에 도착하게 될 거야”


만약 영화를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면 <어 퍼펙트 데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서두에 썼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와 유쾌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며 남 탓을 하지 않고 스스로의 신념을 가지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이지요. 그리하여 길을 잃고 헤매더라도 계속 가면 언젠가는 집에 도착할 거라고. 내가 힘들게 얻은 것을 손쉽게 내어준 사람의 마음조차 보호해야 하는 거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기를. 인생의 가장 불행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어도 자연과 대적하여 고함치는 에이허브가 아닌 “완벽한 날인걸”이라고 중얼거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P.S 이 글을 쓰는데 무려 3주가 걸렸습니다. 많이 두려웠습니다. 다시 쓰지 못하게 될까 봐. 또 한 편의 글을 만드는데 몇 달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그 시간을 들인 결과에 실망하게 될까 봐. 언젠가의 다시에게 부탁합니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이 글을 보면서 비웃어 달라고. 너는 너무 걱정이 많은 놈이었다고. 



2022년 6월 19일부터 2022년 7월 10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영화 이야기 <더 배트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