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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ul 10. 2022

영화 이야기 <더 배트맨>

<더 배트맨>에서 배트맨은 “나는 복수다”라는 말과 함께 등장합니다. 배트맨의 부모는 고담의 범죄자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복수에는 당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당위는 사적인 것입니다. <더 배트맨>의 배트맨은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위해 싸웁니다. 그리고 이 복수는 다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을 위한 것이며 정의가 아닌 원한에 의해 추동되고 적법한 처벌이 아니라 난폭한 폭력에 의해 집행됩니다. 맷 리브스의 배트맨이 팀 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과 다른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배트맨은 영웅이 아니라 개인인 것입니다.


영화의 시작이 핼러윈인 이유도 아마 그래서일 것입니다. 복장은 캐릭터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 복장을 입은 자경단이 출몰하는 것은 바로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캐릭터는 법과 정의가 타락한 어두운 빛의 도시에 밝은 밤을 불러오는 영웅을 상징합니다. 자경단은 배트맨 복장을 입음으로써 바로 자신들의 행위에 배트맨의 캐릭터를 입히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배트맨은 정의라는 의미로 충만한 단어인 것입니다.


하지만 <더 배트맨>에서 배트맨은 아무것도 상징하지 않습니다. 배트맨 복장은 그저 핼러윈 코스튬일 뿐입니다. 이 영화에서 배트맨이라는 단어는 텅 비어 있습니다. 그것은 복수에 눈이 멀어 허무로만 가득 찬 브루스 웨인의 자아와도 일치합니다. 영화 중반에 자신을 대신해 사고를 당한 알프레드의 병실에서 브루스 웨인은 말합니다. “다 극복한 줄 알았는데 아직 두려움이란 감정이 남아 있다니.” 인간의 감정은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하얀 것이 아니라 검은색으로 그 모든 색을 칠해버린 것입니다. 말하자면 극복한 것이 아니라 덮어버렸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가 덮은 것은 복수에 불필요한 감정들이 아니라 바로 무엇을 위해 복수를 하는가 하는 정당성. 즉 스스로의 공동인 것입니다.


<더 배트맨>에서 배트맨이 눈을 검게 칠하는 것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그것은 한 단어로 말하면 맹목입니다. 원한이라는 감정에 휩쓸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 남자의 쓸쓸한 자기표현인 셈이지요. 하지만 얼굴을 반만 칠한 건달이 선과 악 사이에서 길항하듯 온몸을 검게 칠한 배트맨의 얼굴에도 덮이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숨을 쉬는 부분이지요. 그것은 또한 브루스 웨인이 스스로 인정한 ‘아직 넘어서지 못한 두려움’, 즉 누군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배트맨의 생명은 그가 인위적으로 검게 덮은 부분이 아니라 미처 극복하지 못한 두려움에 의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타인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점에서 이타적이며 윤리적입니다.


따라서 <더 배트맨>의 서사란 텅 빈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원한에 가득 찬 사적 개인이 사회적 윤리를 획득한 공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이면서 모든 것을 잃고 어둠 속에 스스로를 파묻어 버린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극복하는가 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 메인 빌런인 리들러는 바로 그가 말한 ‘고통 속에서 답을 찾지 못한 인간’이었습니다. 모든 고통은 질문입니다.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답을 찾지 못한 자는 악당이 되고 답을 찾은 자는 영웅이 됩니다. 배트맨이 찾은 답은 이것입니다. “복수는 과거를 바꾸지 못한다.” <더 배트맨>을 읽는 일은 스스로를 복수로 규정했던 한 남자가 어떻게 이 답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읽는 일입니다.


영화는 복음성가로 시작합니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노래죠. 바로 Ave Maria입니다. 이 말은 단순 직역하면 안녕하세요, 마리아 님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를 임신한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와 건넨 최초의 인사말이기도 합니다. 영화가 이 노래로 시작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건 바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마리아의 자식이기 때문이지요. 


마리아는 동정녀입니다. 그 말인즉 예수는 아버지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영화 속 등장인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브루스 웨인은 강도에게 아버지를 잃었고 리들러는 고아이며 셀리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영화의 첫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시장 살해의 결과는 다름 아닌 아버지 없는 자식을 만든 것이었죠.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아버지 없는 자식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흔히 역사를 나누는 기준으로 B.C와 A.D를 씁니다. 이 기준은 바로 예수의 탄생일이지요. 바꿔 말하면 역사의 시작은 아버지 없는 자식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된 것입니다. <더 배트맨>이 Ava Maria로 시작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역사는 지금 새롭게 시작된다는 것. 리들러가 감옥에서 Ave Maria를 부르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을 홍수로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 말하자면 리들러는 스스로를 예수의 위치에 두고 있는 것이지요.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것은 흔히 욕으로도 쓰이지만 그 기원은 근본을 확인할 수 없는 존재를 뜻합니다. 자신의 근본을 확인할 수 없는 자는 해답을 찾을 때까지 근본을 탐색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새로운 근본이 되어야만 합니다. 전자의 위치에 있는 것은 배트맨이고 후자에 위치한 것은 리들러입니다. 살인 사건의 단서를 수집하면서 배트맨이 알아가는 것은 사건의 전모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까지 배트맨은 스스로를 억울하게 죽은 부모를 대신한 정당한 복수자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팔코네를 만나면서 사실은 그의 아버지, 즉 토마스 웨인 역시 고담의 범죄 조직과 연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로 인해 배트맨은 그동안 자신이 행했던 범죄자들을 향한 폭력의 정당성을 잃고 혼란에 휩싸이게 되지요. 말하자면 그는 탐색을 통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근본에 대한 탐색이 오히려 혼란을 몰고 온 이유는 우선 질문하는 자가 리들러이기 때문입니다. 리들러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대답하는 자입니다. 영화 속에서 모든 수수께끼를 리들러가 내고 있는 것은 바로 그가 마음속에 답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답을 가진 자는 질문하는 자가 그 답으로 오게끔 유도합니다. 토마스 웨인은 부패한 정치가이자 자본가였고 고담의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간 뒤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리들러의 답이었습니다. 따라서 리들러가 설계한 문제를 푸는 이상 배트맨은 당연히 그가 만들어 놓은 답으로 끌려올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배트맨의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근본에 대한 탐색 끝에 맞닥뜨린 배트맨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정당한 복수자인가. 여기서 배트맨이 스스로에게 묻는 것은 정당성의 여부입니다. 토마스 웨인이 팔코네와 연루된 범법자였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지요. 팔코네의 말대로 토마스 웨인이 범죄를 저지른 것이 맞다면 자신이 이제까지 해온 모든 응징은 단순한 화풀이나 폭력이 되고 마니까요.


바로 이 점이 문제입니다. 누가 옳으냐의 문제. 팔코네의 말이 맞다면 토마스 웨인은 죽어 마땅하고 알프레드의 말이 맞다면 토마스 웨인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인가. 이 물음에는 이상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한 개인의 잘못을 또 다른 개인이 심판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팔코네의 말처럼 마로니가 토마스 웨인을 죽였든 아니면 팔코네가 토마스 웨인을 죽였든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심판이며, 이런 개인의 심판을 일러 우리는 범죄라고 부릅니다. 누가 나의 친지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해서 내가 가해자의 친지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요. 따라서 배트맨이 물어야 하는 것은 나는 정당한 복수자인가가 아니라 복수는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배트맨>에서 이 아비 없는 자식들의 복수극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것이 개인의 심판이라는 점입니다. 고담은 법원과 경찰이 없는 도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법천지가 끝나지 않는 것은 바로 사적 원한의 연쇄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배트맨의 복수든 셀리나의 복수든 그것은 공적 영역의 중재 없이 개인이 또 다른 개인을 함부로 심판함으로써 결국 한 개인이 공적 영역마저 심판할 수 있다는 착각(리들러)을 만들어내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트맨은 켄지를 죽이려는 셀리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선을 넘으면 당신도 똑같아져.”


올바른 답을 얻기 위해서는 올바른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근본을 향한 탐색 끝에 배트맨이 새롭게 얻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모든 것을 극복했다고 생각한 후에도 소중한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가. 그는 비로소 정당성이 아닌 상실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아 결국 소중한 누군가를 상실하게 만든다는 것. 이것이 질문에 대한 배트맨의 답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수로 과거를 바꾸지는 못한다. 그 누구의 과거도. 그 이상이 되어야만 한다. 세상에 필요한 건 희망이다. 누군가 지켜줄 거라는. 도시는 분노했고 흉터가 남았다. 나처럼 상처가 나은 뒤에도 남은 흉터에 무너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이겨낸다면 달라질 수 있다. 스스로 견디고 맞서 싸울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제 배트맨은 정의의 폭력을 휘두르는 응징자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시민을 구하는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재난의 흔적이 묻은 코스튬은 더 이상 텅 빈 핼러윈 복장이 아니라 영웅의 상징으로 채워진 것입니다. 마음속에 답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만만했던 리들러의 심벌이 물음표였던 역설은 그가 거짓 예수였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마음속에 물음을 가지고 고통 속으로 들어간 배트맨은 모세와 같이 횃불을 들고 길 잃은 자들을 인도하게 됩니다. 언제나 그랬듯 옳은 길을 찾는 것은 아픈 물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반대는 없습니다.



2022년 6월 5일부터 2022년 6월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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