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Jun 18. 2022

영화 이야기 <하우스 오브 구찌>

동화 <헨델과 그레텔>은 먹을 것이 없어 버려진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허기진 아이들은 과자로 된 집, 즉 먹을 것이 가득한 집을 찾지만 사실 그 집은 아이들을 잡아먹는 마녀의 집이었죠. 이 동화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결핍과 충족의 이상한 상관관계입니다. 아이들 앞에는 딱 배고픔을 해결할 만한 정도의 안전한 음식이 아니라 배고픔을 해결하고도 남을 위험한 음식만이 제공됩니다. 말하자면 안전한 충족 대신 위험한 과잉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배가 고플 대로 고픈 아이들은 이것이 위험한 것인지 아닌지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일단은 먹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결국 마녀에게 붙잡히게 되지요.


<하우스 오브 구찌>, 이른바 구찌의 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은 가죽 제품을 파는 곳입니다. 가죽이란 껍데기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 껍데기는 동물의 외피지만 가공되어 사람이 걸치는 순간 자본이 되고 계급이 되며 정체성이 되어 마침내는 자기 자신이 됩니다. 호랑이 가죽을 걸쳤더니 호랑이가 되었다는 전래동화와도 비슷합니다. 구찌를 걸치면 구찌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 구찌를 걸치게 하는 원동력, 즉 구찌의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허기란 결국 정체성의 허기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상상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영화는 파트리치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그건 너무나 달콤하고 매혹적인 이름이었어.” 이 말에는 선악과를 먹은 이브의 회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 이름이 “부유함과 스타일 그리고 권력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파트리치아를 낙원에서 몰아낸 것은 바로 부유함과 스타일 그리고 권력인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파트리치아를 구찌의 집으로 이끈 허기, 즉 자기 자신을 상상하기 위해 필요한 재료로서 무엇보다도 자본과 스타일 그리고 권력이 필요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녀를 낙원에서 몰아낸 것도 그리고 낙원을 상상하게 한 것도 자본과 스타일, 권력이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을 보다 좋은 것으로 상상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들이 거꾸로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결과를 불러왔다는 뜻입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영화 속에서 파트리치아는 결코 가난한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구찌 가에 입성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찌 가에 입성함으로써 그녀는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좋은 것으로 상상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상실한다는 이야기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스스로를 잡아먹는 기괴한 설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것은 배가 고파서 자신의 꼬리를 삼킨 뱀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제각각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본래의 자기 자신을 계속 상실해간다는 것입니다. 파트리치아는 처음에는 에너지 넘치고 성적 매력이 가득한 아가씨였지만 후반부에 이르면 남편 살해를 청부하는 음험한 미망인이 되고, 올바른 신념을 가진 정직한 청년이었던 마우리치오는 사치와 무절제에 물들어 타락합니다. 겁이 많지만 착한 파올로는 아버지를 경찰에 고발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구찌의 왕처럼 보이던 알도는 몰락한 채 죽습니다. 이렇듯 본래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면서도 그것이 더 나은 자기 자신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이 환상은 당사자의 눈을 가려 무엇을 잃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드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우리치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난생처음이야. 내 마음대로 살아보는 거.”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유라고 명명하는 것은 역설이지만 여기에는 서로 충돌하지 않는 진실도 있습니다. 자본과 스타일 그리고 권력이란 모두 자기 자신을 보다 좋은 것으로 상상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다 좋은 것으로 상상하기 위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이전의 자기 자신이지요.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보다 좋은 것을 상상하는 일은 이전에 자신을 버리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우리치가 말하는 자유라는 것은 이 지점에서 역설이 아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예전의 자기 모습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끝내 역설일 수밖에 없는 것은 자본과 스타일 그리고 권력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다 좋은 것으로 상상하고자 하는 이 정체성의 허기는 바닥이 없습니다. 이 허기의 이름을 욕망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마우리치가 느끼는 자유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자기 자신의 자유가 아니라 욕망의 자유인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자기 자신이란 욕망을 통제할 수 있을 때만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자의 집이든 구찌의 집이든 언제나 상대측에서 안전한 충족을 내놓는 일은 없습니다. 위험한 과잉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조절은 언제나 스스로의 몫인 것입니다.


제가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얼마 전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에서 김영하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자기감정을 표현할 마땅할 언어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책이라는 건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보다 더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거라는 말이지요. 말하자면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언어로만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정체성에 대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구찌로 상징되는 자본과 스타일 그리고 권력이란 얼핏 자기 자신을 보다 좋은 것으로 상상하기 위한 정체성의 재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히 말해 정체성의 재료가 아니라 정체성의 표현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정체성이라는 말의 뜻처럼 정체된 성질, 즉 상태를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그러한 자기 자신을 상상하기 위해 수행하는 모든 동적인 성질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건 마네킹이 아니라 움직이는 인간인 것입니다.


따라서 구찌를 입은 자기 자신을 상상하는 것만이 정체성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스스로를 마네킹으로 상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구찌를 입고 끊임없이 신분 상승을 하고 있다고 해도 관객들의 눈에 보이는 파트리치아의 정체성은 고귀한 명품이 아니라 추한 탐욕인 것처럼요. 말하자면 파트리치아에게 구찌란 정체성의 언어인 것입니다. 그녀는 구찌가 아니고서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가 말하는 것은 결국 이런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구찌란 자기 자신을 보다 좋은 것으로 상상하게 해주는 재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잡아먹는 탐욕의 입마개를 풀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 다시 말해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과 스타일 그리고 권력은 정체성의 재료가 아니라 오히려 정체성의 상실을 불러온다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을 상상할 때 그 기본 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고유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찌를 입고 있다면 그것은 고유한 것이 아니겠지요.


영화 속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을 시뇨라 레지아니라고 호명하는 판사에게 파트리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뇨라 구찌라고 불러주세요.” 파트리치아 레지아니라는 여자는 이제 없는 것이죠. 말하자면 파트리치아는 끝내 허기에 잡아 먹힌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은 구찌이지만 구찌가 되길 원했던 그녀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남은 것은 껍데기뿐이지요.



2022년 5월 29일부터 2022년 6월 5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영화 이야기 <사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