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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Sep 06. 2022

영화 이야기 <토이 스토리 3>

전편이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토이 스토리 3>은 공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서부의 광활한 황야에서 시작합니다. 포테이토 도적단이 점거한 기차가 절벽을 향해 달리고 있고 우디와 제시는 승객을 구출하기 위해 그 뒤를 바싹 추격하고 있습니다. 조금 있다가 밝혀지지만 이 시퀀스는 앤디의 상상입니다. 끝이 없는 황야도 까마득한 절벽도 모두 앤디의 머릿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이 시퀀스는 우디와 버즈를 비롯한 장난감들이 있어야 할 장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아이들의 상상 속이지요.


전편에서 버즈는 말합니다. “어느 장난감이 가르쳐 줬어. 중요한 건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거라고.” 사랑받는다는 것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그 사람만을 위한 장소를 마련해 두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장소는 갈 곳이 없는 한 사람에게 비로소 갈 곳을 만들어 줍니다. 갈 곳이 있다는 것은 길이 있다는 것이고 길이 있다는 것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지요. 말하자면 장소란 생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생이 움직일 때 인간은 살아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마르멜라도프의 입을 빌려 말하지요. “인간은 누구나 갈 곳이 있어야 하는 법이오!”


<토이 스토리 3>는 갈 곳을 잃은 장난감들이 자신의 갈 곳을 찾아 헤매는 궤적을 그린 영화입니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된 앤디는 더 이상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습니다. 우디와 버즈조차 상자 바깥으로 나온 지 오래됐지요. 설상가상으로 앤디가 떠나면서 장난감들은 버려질 위기에 처합니다. 우디를 데려가긴 하지만 이때 우디는 놀이의 목적이 아닌 추억의 전시품으로 데려가는 것이지요. 결국 장난감들은 자신과 함께 놀아줄 아이들을 찾기 위해 어린이집 ‘써니사이드’로 향하게 됩니다.


다락 혹은 쓰레기통이 누구도 쳐다보지 않고 사랑해주지도 않는 무관심, 즉 음지를 상징한다면 써니사이드는 말 그대로 양지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 양지는 따뜻한 곳이 아니라 뜨거운 곳입니다. 그곳에서 장난감들은 가학에 가까운 관심. 장난과 무지로 점철된 폭력 속에 방치되지요.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에는 너무 어린 아이들은 폭군과도 같습니다. 부서지거나 사라질 때까지 던지고 핥고 부수기를 반복하지요.


극단적인 양 갈래 상황 속에 장난감들을 둠으로써 <토이 스토리 3>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난감들은 자신들이 버림받은 이유를 앤디가 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앤디의 육체가 성장했다는, 즉 물리적인 변화가 자신들과 앤디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었다고 믿는 것이지요. 물론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장난감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몸이 커졌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다른 곳으로 향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해도 새로운 장난감이 생기면 기존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에게 흥미를 잃기 마련입니다. 것은 물리적인 조건의 변화가 아니지요.


따라서 <토이 스토리 3>의 장난감들이 그리는 궤적은 애초에 그들이 있었던 곳이 앤디의 방이 아니라 앤디의 상상 속이었음을 깨닫는 여정입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누군가가 가야 할 곳 혹은 있어야 할 장소라는 것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이라는 뜻도 되지요. 오다 에이치로가 그린 <원피스>에도 같은 맥락의 대사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수명이 다했을 때가 아니라 잊혔을 때야”. 생명이라는 것은 과학만이 아니라 공감의 영역에도 속해 있음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사실 <토이 스토리>라는 영화 자체가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속에서 장난감들이 단순히 플라스틱 완제품으로만 존재한다면, 실제로 날 수 없는 장난감이라도 상상 속에서 무한의 우주를 향해 날아오를 수 없다면, 애초에 <토이 스토리>라는 영화가 성립되지 않았겠지요. <토이 스토리>의 장난감들이 스스로 움직이고 말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장난감들을 위한 집을 지어준 일이 있으니까요.


영화의 말미에 앤디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장난감을 보니에게 주고 갑니다. 마음이 깃드는 일은 그렇습니다. 어린이집처럼 무수한 아이들의 끝없는 관심 속에 노출되는 게 아니라 수줍음 많은 한 아이의 마음속에 조용히 숨어 들어가는 일이지요. <토이 스토리>의 모든 사건들은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한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건 장난감들이 움직이는 걸 들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기보다 사람들 모두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찾기 위한 모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서 13장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견디고 참는 일이야 말로 인생의 가장 큰 모험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험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들리지 않는 말들로 이뤄지지요. 꼭 장난감의 모험 같습니다.



2022년 8월 31일부터 2022년 9월 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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