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빈민가 생선 좌판대 밑에서 태어난 한 아이
태어나자 마자 버림받았지만, 질기고도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성장해가는 그르누이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며 기피하는 것은 그가 가까이 다가와도 마치 그림자나 유령인양 아무런 느낌도 가질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에게는 모두가 가진 고유의 어떠한 냄새도 가지질 않았기에 곁에 있어도 돌아보기 전엔 그 존재를 느낄 수 없기에 그런 그를 사람들은 기피하고, 그 기피는 두려움으로 커져가고, 두려움은 거부와 배척으로 이어져 간다
그런 그르누이를 어느날 사로 잡은 향
향을 쫒아 향의 주인공을 살해하고 그 향을 뺴았는다
향을 얻은 그는 사람들의 사랑도 함께 얻게 되면서,
첫번째 살인은 그 뒤 여러 향을 얻기 위해 이어지고 이어지는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가진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
내게선 어떤 향이 날까?
화가들은 자화상을 즐겨 그린다
고흐의 영화속에서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는 모델료가 들지 않기 때문이라 말하지만,
그 보다 자기 자신을 보고 싶은 갈망아니었을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내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과 달리
어색하고 저게 나인가 싶은 낯설음속에 빠지고는 한다
어느날 진료실을 찾은 한 어린 아이
진료중 엄마에게 할아버지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벌써 내가 그런 말을 들을 나이에 접어 들어가는 걸까?
하긴, 그 아이 엄마나이를 보니 딸아이와 별 차이가 없음을 보면 할아버지의 연배도 나와 비슷할지도
예전에는 바이오리듬이란 말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바이오리듬을 체크해주는 그런 상품들도 있었던 기억이 난다
지난 주 부터, 아니 지난 해 부터인가, 아니 언젠가 부터 그 바이오리듬이 선아래로 떨어져만 간다
바이오리듬이 아닌, 삶에 대한 기대감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는 것일까?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할 때는 너 왜?를 말하고, 화도 내 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대함에 있어 감정을 줄이게 된다
너 왜? 보다
그렇구나로 바뀌어 가는
하고 픈 것들도
가고 싶고
가지고 싶고
먹고 픈 것도 특별히 떠오름없이 아침이면 어김없이 다시 돌아오는 저녁
그런 하루 하루가 한 주에서 한 달로, 그러다보면 또 한 해가 가게 되는 시간의 흐름
그 흐름에 그냥 묻혀 흘러가는 시간들이다
안다
나 스스로가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감정의 골에서 벗어나야함을
알면서도, 그냥 당분간은 시간의 흐름속에 묻혀가고 싶다
소설속 그르누이의 마지막은 스스로 택한 잔혹한 죽음으로 마쳐진다
나만의 향
자화상을 그리듯
나를 나 스스로 보려 한다면 어떠해야할까?
유행성 질환때문일까?
유독 더 한가로워진 진료실
오늘도 친구 하나가 찾아와 어제 저녁부터 이어 가라앉아가던
감정에 도움을 주고 간다
고교동창들은 별 이유없이 그냥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로 다시 나를 보내주는 걸까?
만약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난 지금과는 다른 길을 선택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