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몰려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면 그건 자살일까? 타살일까?
지난 주말 대학동기의 상가에 모였던 친구들은
서로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다 취해서들 해어졌다
동기의 자살
적지 않은 술자리에서 허허거리며 했던 말들이 사실은 도움을 청했던 말들이었음을 너무도 늦게야 알았다
죽음,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이가 있다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할 수 있을까?
지혜로운 삶을 살았기에 후회나 스스로에 대한 갈등이 없구나 해야 할까?
아니면, 참 강하구나 해야 하는 것일까?
미국의 종교철학자 사이먼 크리즐리의 책 ‘자살에 대하여’를 끌어 안고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난 길을 걸으려 애를 쓰건만 자꾸만 발을 거는 무언가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막힘에 질퍽거리는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느낌을 가졌던 시절
책의 표지엔 ‘우리에게는 자살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할 언어가 없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그는 자살에 대해 뜨거운 차 속의 설탕처럼 사라져 버렸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차를 손에 쥐고 있는 자의 아픔은 어떤 것인지 잡아본 자, 잡고 있는 자는 알 듯. 극중, 스크린에서 보아온 이미지가 있었기에 알 권리로 시시각각 보도를 내는 언론에 비친 그를 보며 걱정 어린 마음이 현실화된 기사를 보았다.
반사회적,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 자 비난 받고 그 벌을 받아야겠지만, 그 과정도 중요하지 않을까? 대중은 유죄추정의 원칙에서 바라본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대중은 남을 볼 때는 수학자, 과학자가 되어 따지고, 혹여 라도 놓친 건 없는지 현미경으로 찾고 또 찾으려 한다
강한 자가 남는 게 아닌, 남는 자가 강한 것임을 오늘 또 한 번 본다
유죄추정의 법칙이 통하는 언론사회속에서 자살이라 쓰고
사회적 타살이라 읽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