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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단 Jul 08. 2024

친애하는 시트론 선수님께

안녕하세요.

말끄미 대표 머리빗입니다.


사실 제가 하는 사업은 저희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업이었어요. 아주 오랜 과거부터 현재까지 쭉 거래를 이어오는 인간 가문이 탄탄한 주요 고객층이셨죠. 그런데 저희와 공생하며 동업하던 형제기업인 ‘머리 이’ 측이 시대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한국을 떠나셨어요. 남아공 쪽으로 가셨다고 들었는데 그쪽에서는 여전히 이 사업이 블루오션이라고 들었어요.


어쨌든, 사업 파트너가 사라졌으니 가업의 규모도 점차 수그러들고 수입 또한 일정 선에서 정체되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헤어롤이나 면도 등 유사기업에서 무서운 속도로 사업을 확장하여 이렇게 두면 머리빗 가문의 가업이 존폐위기에 놓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제가 본격적으로 가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저는 가업을 일으키기 위해 가장 먼저 공생 파트너가 사라진 우리에게 남은 장점이 무엇일까를 고민했어요. 저는 상대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눈물이 찔끔 나는 고통을 줄 수도 있고, 반대로 발끝까지 찌릿찌릿해지는 시~원한 쾌감을 줄 수도 있지요. 그래서 저희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져 오는 이 능력을 살려 줄 다양한 외모의 직원들을 발탁했어요. 요즘 사람들은 뭐든 예쁜 걸 좋아하니까 피부색이 형형색색으로 화려한 직원, 빗 꼬리가 엄청나게 길거나, 꼬리는 몹시 짧아도 머리가 굵은 직원까지 다 각자의 쓸모가 있거든요.


저희가 주로 하는 일은 교통정리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되는데요, 어제는 강풍의 영향으로 엉망이 된 인간 가문의 의뢰인을 정리해 주고 왔어요. 제가 엉망으로 엉킨 인간들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느라 지나다닌 길을 보면 낙엽같이 우수수 흩어진 잔해들이 많이 남는데 그 탓에, 버럭 화를 내시는 의뢰인들이 자주 계세요.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그게 저희 탓은 아닙니다. 다들 낙엽을 떠올려보세요. 낙엽은 자신의 본분을 끝마쳤기 때문에 자연스레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지 제가 끌어내린 게 아니랍니다. 교통정리가 끝나고 떨어진 머리카락들은 원래가 떨어질 운명이었단 의미죠. ​



요즘은 그런 클레임에 진절머리가 나서 주요 고객층을 바꿔보려 노력하고 있어요. 1년 치 클레임 접수 추이를 검토해 보니 인간 가문에서 접수된 클레임이 대부분이더라고요. 사실 동물업계에서는 계절 따라 ‘털갈이’하는 풍습이 있어 털을 빨리 정리해 드리는 걸 오히려 좋아하세요. 그래서 최근 동물업계 큰손이신 고영희 여사님께 영업을 나갔는데 체험판부터 아주 만족하시어 골골송을 흥얼거리셨습니다. 결국, 아랫배 영역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겠다는 계약조항을 걸고 첫 거래를 성사시켰어요. 고영희 여사님은 저와의 거래가 꽤나 마음에 드셨는지 시트론 선수님까지 선뜻 소개해주셨답니다. ​



덕분에 이렇게 편지를 드릴 수 있게 됐네요.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컨디션 관리는 잘하고 계신지요. 저는 이 일을 하다 보니 몸 이곳저곳이 부러지기도 하고 퇴근 시간만 되면 일하는 동안 몸에 쌓인 털과 머리카락 잔해에 짓눌려 정작 제 모습은 엉망이 되거든요. 그럼 에도 이 일은 제게 큰 기쁨입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각설하고, 경기 출전으로 요구되는 민감한 조건이나 옵션도 면밀히 검토하여 추가해 드릴 수 있으니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바람 따라 일렁이는 갈기와 말총꼬리 관리를 저희에게 맡겨 주심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시트론 선수님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제게는 큰 영광입니다. 그동안 쌓인 노하우를 십분 발휘해 엉키지 않고 찰랑이는 털들로 보답을 드릴게요. 그럼 다음 달 제주 미팅에서 뵙겠습니다.


제 진심이 닿았길 바라며,

2023년 9월 30일 말끄미 대표 머리빗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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