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
대학교 1학년.
정확히는 새터, 그러니까 새내기 배움터 때였다. 3월이었지만 아직 눈발이 흩날릴 만큼 추운 날이었고 행사 장소는 무려 강원도였다. 단체버스에 올라 서먹서먹하게 앉아있는 신입생들을 휘 둘러보니 불행하게도 우리 과는 극단적인 여초과였다. 그 말은, 1박 2일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어떤 무리에도 끼이지 못하면 첫 1년간 누구와도 함께 다니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여중, 여고를 거치는 6년간의 짬밥을 통해 그 법칙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대학생활 첫 해부터 아웃사이더가 될 용기가 없던 내가 택했던 전략은 '취한 동기 챙기기'였다. 지방 출신 특유의 오지랖과 큰 키를 이용해 끊임없이 취한 아이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죽은 아이들을 옆방으로 옮겨 날랐다. 한잔을 마시고, 한 명을 나르고, 또 한잔을 받고 두 명을 달래고, 돌아와보니 또 누군가 바닥을 뒹굴고 있고. 그러는 동안 나는 어느새 새벽 5시까지 살아남은 최후의 인원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사실, 그렇게 쉼 없이 뛰어다니느라 첫 술의 느낌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소주는 소독약 맛이 났다는 것, 소독약을 희석하려고 과자를 입에 밀어 넣으면 소독약 과자가 되더라는 사실 정도만 어렴풋하다. 왜 먹는지 알 수 없는 맛이었지만, 잘 마셨을 때의 사람들의 반응이 더 좋았다. 마치, 이걸 잘 해내면 쉽게 사람들 사이에 섞일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끽해야 네다섯 잔을 마셨을 뿐인데, 사람들의 머릿속엔 내가 새터 최후의 생존인이라는 기억만 남았다.
'술을 새벽까지 먹는 엄청난 여자애'는 과에서 입소문을 탔고, 모두가 나만 보면 ‘너 술 잘 먹는다며?’를 물었다. 그래, 거기까진 좋았으나, 문제는 나 스스로도 그 말을 믿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술자리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나에게 술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엄청난 핑계거리였다. 그러니 나는 술을 잘 마셔야만 했다. 내가 나를 술꾼으로 믿어버리는 그 순간 이후부터 그렇게, 나의 술꾼인생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