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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깔끔하게 Sep 07. 2023

시험

학생들은 대충 시험 주간 2~3주 전부터 시험 기간이라 부르는 것 같은데 교사들은 시험문제를 낼 때가 시험 기간이다. 대충 한 달 전쯤 시험지 양식이 날아 온다. 일 년에 네 번이나 보는 시험지 양식인데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일단 창을 끈다. 그리고 며칠을 묵힌다. 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하기 싫으니까.


제출 기한에 맞추려면 어쨌든 내야 한다. 일단 교무실에 들어오지 마시오 문구를 붙여야 한다. 문제가 유출되는 순간 1번부터 다시 내야 한다. 검색해 보니 올해는 푸바오가 들어오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그림이 있다. 푸바오는 귀엽지만 출력하기가 귀찮아서 그냥 들어오지 마시오만 써서 붙인다.


시험지 양식에 제일 먼저 쓰는 말은?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이제 뭘 낼지 생각한다. 책도 들여다 보고 내줬던 학습지도 들여다 보고, 교사용 지도서도 펴 본다. 슥 보고 일단 꼭 내야 하는 문제를 뽑아 낸다. 단원별로 안 내면 안 되는 문제가 있다. 제일 중점적으로 가르친 내용들이다. 대놓고 중요한 문제들이라 정답률이 높지만 그래도 내야 한다.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한 걸 안 내면 뒤통수를 치는 셈이니까. 그리고 다시 짜내는 시간. 지문은 뭘 내지, 이걸 이렇게 엮어 볼까, 이걸 물으면 어떨까. 아니야 이게 아니야 으악! 지워 지워 지워 지워 지워.


뭘 낼지 대충 결정이 되면 이제 시험지에 구현을 해야 한다. 아이디어와 구현은 또 다른 법. 여기서도 몇 번 내용이 뒤집어진다. 거의 다 냈다가 5번 보기가 생각이 나질 않아서 지우기도 한다. 어쩔 수 없다. 시험은 내는 사람 마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는 사람 마음에 들어야 한다. 자, 다시 내 보자. 이걸 이렇게 내면 요 문제랑 좀 겹치니까 안 되고. 이건 너무 지엽적이라 안 되고. 이건 학습 목표랑 너무 멀어서 안 되고. 아 이건 너무 쉬워. 이 과정을 거치다 보면 꾸역꾸역 목표 지점에 도달한다.


문제를 만들다 보면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대부분 시험치는 이들을 배려한 것들이다. ①번은 내용이 제일 짧고 갈수록 길어져 ⑤번은 제일 길어야 한다. 아니면 반대로 제일 긴 문장에서 짧은 문장으로 배치하든지. 그래야 가독성이 좋기 때문이다. 가끔 문장 길이가 뒤죽박죽일 때도 있는데 그건 지문에서 나오는 순서대로 배치했거나 뭐 그런 이유다. 여튼 수험생이 읽기 좋도록 배치해야 한다. 또 지문 외의 자료를 너무 많이 제시하면 안 된다. 시간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어 뜻을 묻는 단순한 문제는 낼 수 있지만 너무 많으면 안 된다. 한 문제 정도면 족하다. 여튼 이런 저런 원칙들이 있다. 시험지를 검토할 때는 이런 부분도 같이 검토한다.


한 과목을 여러 사람이 쪼개서 내면 몇 문제 안 내도 되지만 한 사람이 여러 과목을 가르치면 엄청 많이 내야 한다. 문제를 많이 내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불쌍하다. 아는 게 없어서 도와줄 수도 없고. 사회 과학 지문을 내면서 오류 없는지 봐달라면서 괴롭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자 다 냈다. 이제 편집과 검토의 시간. 1번부터 25번까지 배치하고, 글씨체 통일하고, 글자크기 통일하고, 밑줄 그을 데 다 긋고, 표 크기 조절하고. 뚝딱뚝딱. 다 되면 요리보고 조리보고 나눠보고 돌려보고 하면서 오류가 없는지 본다. 큰 오류가 발생해 재시험이라도 치게 되면 그만큼 마음이 힘든 게 없다. 자존심에 스크래치난다. 여러 번 들여다 보고 낸 사람들이 다 같이 검토하면 대부분 오류는 잡아낼 수 있다.


그러고 제출을 한다. 생각한다. 이번에도 제발 무사히. 그리고 다음 날 걸려 오는 전화. 이거 이거 틀렸으니 고쳐 오세요라는 평가계 선생님. 에이 거참. 허허 웃으며 고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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