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새로미,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적확하다'라는 단어가 '정확하다'의 오타가 아니라 의미가 아주 좁고 사용처가 명백한 용어를 맥락에 찰떡같이 붙였을 때 쓰는 형용사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내 언어는 한 차례 확장되었다. 나는 적확한 단어와 문장을 뽑아 내는 작가들의 글을 동경했고, 문장을 세 번 읽으며 더 어울리는 단어를 골랐다. 고른 단어가 꼭 맞는 퍼즐처럼 문장에 의기양양히 자리잡았을 때, 그리고 내 글을 남다르게 해주었다고 느낄 때 보람있었다.
언어를 충분히 좁혀내지 못해 오해받고 괴로운 적도 있었다. 어느 회사 인턴 시절 '왜 내게 하십시오체를 쓰지 않고 해요체를 쓰느냐' 로 시작해 나의 태도와 개념까지 문제삼은 평가자의 질책에 나는 위축됐고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점점 길어졌다. '혹시 괜찮으시면' 으로 시작해 '부탁드려도 될까요?'로 늘 끝나야 하는 말. 그렇게 길어진 말은 또 왜 거리를 두고 사람들과 가까워지지 못하느냐는 또 다른 질책으로 이어졌고, 나는 긴 말을 아주 가끔씩만 하게 되었다.
내 맘을 알아주듯이 저자 허새로미는 한국어가 '대단히 섬세한 언어'라고 말한다. '위계와 분위기를 매우 잘 읽어내며 주변을 배려'하지만, 동시에 '매우 여러 겹의 모욕을 다른 언어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재능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이다. (142p) 윗사람의 kibun을 눈치껏 맞추고, 손짓만으로 원하는 것을 요청할 때 맥락을 읽어내 이해할 줄 아는 것이 미덕인 언어 문화다.
질문하는 어린이였던 허새로미는 질문했을 때 답이 아닌 화, 언짢음, 당황과 심기의 불편함을 회신받고선 점차 질문하지 않게 된다. 어린이들의 '왜?'시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묻고 싶은 마음을 누구한테 뺏겨버린 것처럼 한국 어른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허새로미가 질문을 되찾은 것은 '이중 언어'라는 탈출구를 찾고 난 후다. 질문하는 그를 영어는 미워하지 않았고, 모르면 모른다고 답해주었다.
그는 바이링구얼리즘Bilingualism이 너무 따가운 모국어로부터 자신을 숨겨주는 양산이었다고 한다.(96p) kibun과 맥락을 과히 고려한 "방금 하신 말씀이 이해가 잘 안 되어서 그런데 죄송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대신 "What does it mean?"이라는 질문의 언어를 택한다. 한국어가 자랑스러워하는 '정'이나 '한'을 그 고유한 뭐가 있다며 뭉개기보다는, 샅샅이 감정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낯선 언어로 이름 붙여 보며 나를 들여다 본다.
영어로 이력서를 꼭 써보라는 대목도 인상깊었다. 내 일을 "이것저것 잡다한 거. 이벤트 당첨된 사람한테 경품 주고 잘 갔는지 확인하고 그런거" 라고 말해서 내 직무를 하찮게 만들지 말고, '이걸 모두 제대로 된 동사로 바꾸어 자기 이름을 찾아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171p)
"나는 여러 성격의 많은 일을 하는데 (I do a lot of different things), 고객과의 소통(communicate with customers)부터 고객 보상 프로그램의 감시와 관리(monitor & manage customer rewards system)까지 담당한다."고 말이다.
이중언어가 자신의 탈출구가 되었다고 진심으로 기쁘게 말하는 저자를 보면서 나도 그렇게 영어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 언어에 갇힐 때, 문화의 맥락 상 어쩔 수 없이 상처받을 때,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나와 이 상황을 바라보고 싶을 때 뇌에서 번역기가 한차례 돌아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면 안심이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발췌하고 싶은 문장을 남기며 글을 맺는다.
시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없는 우리가 가끔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를 엿보는 일이 귀신과 외계인을 목격하는 거라면, 다른 세계관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초월적인 영역일 것이다. (182p)
허새로미 저,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현암사
(부제 : 한국어에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영어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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