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단어의 집>
그 즉시 밑줄을 긋고 책을 덮었다. 더 이상 독서가 불가능할 만큼 풍부한 고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12p. <오고오고>
단어 생활자 안희연은 책을 끝까지 읽는 것을 욕심내지 않는다. 주악 같은 문장에 멈칫하더니 그곳에서부터 움트는 생각을 뻗어 잭과 콩나무의 세계로 총총 사라져간다. MBTI검사를 한다면 확신의 N상이다. 나도 그렇기에 조금 상기된 마음으로 콩나무에 탑승해 즐겁게 단어의 세계를 노닐었다.
생각을 멀리 보내본 기억이 희미하다. 해야 할 일 없고, 너무 피곤하지도 않고, 약간은 나른한 듯 또렷한 그런 때,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가만 누워있어야 생각이 뿌리를 내리든 말든 할텐데 손에서는 스마트폰이 안 떠나고 쉭쉭거리며 날아드는 숏폼에 무의식적으로 흔들거리다 마음의 흙을 다 헤쳐놓는다. 그래서 이 책과 함께 따라가본 생각들이 드물고 귀하다.
거대한 바위 아래 깔린 듯 가슴이 답답할 땐 몸을 움직여야 한다. 마음을 조각낼 순 없으니 대신 당근을 써는 것이다. 44p. <라페>
안희연은 가슴이 답답할 때 당근을 썰고 나는 장을 뒤엎는다. 옷장이나 책장 같은 것. 욕심부려 가지고 있던 것을 분류하고 너무 오래된 것이나 다시 손대지 않을 것에도 안녕을 고한다. 남은 자리를 정리하고, 빠져나간 분량만큼 장에 빈칸이 생기면 마음에도 그만치의, 한 뼘만큼의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토해내듯 많은 것을 구겨넣었던 상황이라면 아무리 비워도 빈칸이 쉬이 생기지 않는다. 다 읽고 입을 것도 아니면서 미처 놓지 못한 미련이다. 발견한 데 의의를 두고 이번은 그냥 눈감아주기로 한다. 다음 정리까지도 그대로 있으면 치우겠다고 다짐하면서.
하우스나 홈이나 다 매한가지 아니냐고 생각하는 자에게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거야. 옷 사이로 삐져나온 실밥이나 보풀을 떠올려봐. 무심히 잡아당겼는데 줄줄줄 풀리는 옷을 떠올려봐. 두리번거리는 힘으로 나아가. 순간을 영원으로 붙드는 마법은 그렇게 시작될 거야. 246-247p. <페어리 서클>
영원을 믿고 사랑하리라 다짐하던 굳은 마음에 실금이 가던 날들을 지났다. 잠시 스쳐갈 순간이라고 믿으면 마음이 다치지 않을 것 같아서 마음을 가두고 표정을 지웠다. 무심(無心)은 안전한 선택이었지만 마음 없이 지나온 하루는 물기없이 부서져 기억에도 남지 않는 과거가 되었다.
다시금 문을 열어볼 용기를 내어 볼까. 두리번거리는 힘으로 나아가볼 수 있을까. 잠깐은 멈춰있더라도 결국은 다시 영원을 그리게 되고야 말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쿨하지 못해 슬프지만 나는 내가 생겨먹은 대로 살게 되겠지. 조금은 슬퍼지는 순간이 있더라도.
그러나 이제는 다른 목소리를 꿈꾸지 않는다. 세 번째 시집을 펴내며 적었던 말을 기억한다.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살다 보면 ‘조금’은 슬퍼지는 순간이 왜 없겠는가. 그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178-179p. <탁성>
안희연 저, 『단어의 집』, 한겨례출판
(부제 : 불을 켜면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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