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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만밤 Apr 10. 2022

트로이메라이를 흥얼거리던 오후에

같은 부분을 열 번 반복할 때 나아지는 게 연주뿐은 아니었다

어느 날 노곤하게 흥얼거리던 피아노곡으로 이 글은 시작된다.


노곤히 앉아있다보면 이런저런 멜로디를 흥얼대곤 한다. 그날의 곡은 '도 파- 미파라도파파-'로 시작하는 느리고 자장가 같은 곡,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였다. 생각해보니 연주도 어렵지 않겠다 싶어 악보를 바로 찾아봤다. 한 페이지 길이에 플랫 하나. 할 만 하겠다. 아이패드에 악보를 받고 키보드 전원을 켜서 앉았다. 


* 슈만, 트로이메라이 : https://www.youtube.com/watch?v=rImVFozA0NI

슈만 "트로이메라이", 손열음 연주. 내가 이렇게 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초견으로 악보를 읽어 더듬더듬 쳐보니 조금 연습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페달을 밟아 부드럽게 연결하면 못하는 부분을 대충 덮어 끝까지 칠 수 있을 정도다. 솔직히 그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만뒀다. 소리를 뭉개서 곡을 쳐버릇하면 다시 그 곡을 칠 때 디테일을 연습하기 싫어진다. 대충 할 줄 알겠어도 악보 앞에 정중하게 앉아서 지시를 따르며 차근히 연습해야 곡을 정확하게 쳐낼 수 있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 여덟 마디 정도를 쳤다. 뒷부분을 휘리릭 치고 싶은 마음을 다시 누르고 전원을 껐다.

 

일할 땐 삼십 분 집중하기가 힘든데 악보를 읽다 보면 시간이 금세 간다. 매일 치지 않으니 손가락이 뻣뻣해서 잘 안 되기도 하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연습해서 진도가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퍽 뿌듯하다. "트로이메라이"는 느리고 편안한 멜로디의 곡이라 한참 치고 나면 마음도 편해진다.



나와 피아노의 시작은 특별할 바 없이 동네 피아노학원이었다.


중학교 때까지 피아노 학원을 다녔고, 체르니 40을 시작할 무렵 학원을 그만뒀다. 전공으로 삼을 생각이 없던 친구들은 다들 그쯤 그만두곤 했다. 마지막으로 친 곡은 베토벤 소나타 "열정" 3악장이었는데, 6개월간 그 곡 하나만 쳤다. 연습실에서 치고 있으면 원장선생님이 밖에서 듣고도 틀린 걸 알아맞췄는데, 소름이 돋아서 어떻게 아시냐고 여쭤보니 대학 졸업곡으로 죽어라고 연습했던 곡이라 구석구석을 기억한다고 하셨다. 그게 내 인생 가장 어려운 곡이었고, 이젠 다시 칠 엄두도 안 난다.


대학땐 교회 찬양팀 언니에게 코드 연주를 배웠다. 복잡한 코드 연주하는 법, 자연스럽게 조옮김 하는 법, 밴드 연주에서 건반주자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전수해주고 언니는 떠났다. 가르침받은 것의 절반은 날아갔지만 나는 남아서 반주를 이었다. 그렇게 나는 클래식 얼추, 코드반주 얼추 가능한 ‘딱 취미 수준’의 실력을 가지게 됐다. 어디 가서 돈 받고 연주할 만큼은 안 되지만, 가끔 아는 사람 결혼식에서 덜덜 떨며 입장곡을 쳐줄 수는 있는 정도.



다행히도 뻔한 엔딩은 아니었다. 


여전히 피아노를 치고 있어서 다행이다. 기분이 나아지고 싶은 날엔 유희열 소품집에 수록된 "공원에서"를 친다. 단순하지만 가볍고 경쾌한 곡이라 몸도 손도 들썩들썩한다. 도돌이표가 아주 많은데 악보를 외진 못해서 계속 앞뒤로 왔다갔다 악보를 넘기는 손이 바빠서 웃기다.


* 유희열, 공원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RUwtgft1icA

유희열, "공원에서". 반복되는 구간이 많아 금방 멜로디를 외게 된다.


스트레스 받는 날엔 뭔가 꽝꽝 칠 수 있는 곡을 찾는다. 애석하게도 꽝꽝 치는 곡중에 제대로 연습해둔 곡이 없다. 테일즈위버 OST "Reminiscence" 를 연습하고 있는데 연습을 덜 해놔서... 딱 감정이 고조돼서 쾅쾅 치고싶은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자꾸 손가락이 꼬인다. 그럼 괜히 마음도 꼬여서 피아노를 닫아 버린다. 평소에 연습을 해 둬야 별로 연습은 안 하고 싶고 연주만 하고 싶은 날의 나에게 선물이 된다. 


* Reminiscence. Raynah 연주 https://www.youtube.com/watch?v=QdfcrCxQFfU

Raynah 연주 버전. 듣고 반해서 당장 악보를 다운받은 게 어언 3년 전이다 (아득)



같은 부분을 열 번 반복할 때 나아지는 게 연주뿐은 아니었다.


내 수준에서 피아노는 기술이다. 잘 연주하기 위해서는 손가락이 건반의 위치와 박자를 익숙하게 쳐내도록 같은 부분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연습해줘야 한다. 근데, 이게 당연한 거긴 한데, 연습하고 다시 치면 확실히 나아져 있다. 썩 뛰어나게 잘하는 게 없어도 뭐든 반복해서 하다 보면 어느새 나아져 있을 것 같다는 믿음 같은 마음이 들었다. 회사에서 일을 망친 것 같고 나는 지금껏 뭘 했나 싶은 날에 이게 뭐라고 위안까지 됐다. 연주가 나아진다는 게.


목숨 걸고 지켜낸 취미는 아니었다. 할 줄 아니까 맡겠다고 한 교회 반주 덕에 지금까지 피아노가 이어졌다. 피아노가 늘 치고 싶은 건 아니다. 피아노 덮개에 오래도록 먼지가 쌓일 땐 자리만 너무 차지하는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갑자기 잘 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연습을 마구 하다 전완근이 저리기도 하고 그런다. 그래도 피아노는 내게 종종 위로이고, 뿌듯함이고, 잡생각을 버리고 연습에 매진할 수 있는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반복과 숙달의 과정으로써의 피아노도 일상에 꽤 도움이 된다. 이제 악보 오른편 윗쪽에 동그라미를 그려주는 선생님도 나고 동그라미를 칠하는 사람도 나다. 이제는 정직하게 한 번에 하나씩 동그라미를 칠한다. 어떤 오후에 노곤한 눈을 편히 감고 익숙하게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하는 환상적인 순간을 기대하며. 내 맘 같지 않은 날들에도 손가락들은 결국 악보를 읽어내는 경이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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