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달래 Nov 23. 2023

창곡리의 빨래터는 지금...

에피소드 2. 동생 똥기저귀를 털던 어린 시절



누구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기억을 더듬을 때가 있다.

나는 언제였을까? 4살쯤으로 기억된다.

그때 아빠는 창곡리 군부대에 계셨고(나이가 들어 엄마한테 여쭈어 지도에서 찾아보니 성남 수정구 창곡동의 옛날 지명이라고 하셨다.) 우리 3남매는 오빠와 2살 터울 여동생과는 3살 터울이었다 그때는 한겨울, 엄마는 막내를 낳고 몸조리를 하실 때였다. 창곡리는 서울에서 외진 데여서 엄마의 친정어머니도 시어머니도 오시지 않으셨는지 주인집 아주머니가 도움을 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백일도 안 된 동생은 엄마품에서 젖을 먹으며 자라고 있었고 오빠와 나는 바깥으로 나가 돌아다니며 동네친구들과 놀았던 것 같다. 겨울이 되면 초가집 지붕 끝으로 손가락보다 더 긴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터라 그걸 따서 빨아먹기도 하고 고드름 치기도 하고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5원짜리 풍선껌이나 눈깔사탕을 사서 먹었고 운이 좋으면 뽑기 아저씨한테 하나 더를 뽑아 덤으로 한 개를 뽑으면 그날은 완전히 행운의 날이다. 오빠는 또래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재미있었을 테니 쫄랑쫄랑 따라다니는 여동생인 나를 귀찮아해서 혼자 일 때가 많았다.




우리 집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는 빨래터가 있었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방망이로 빨랫감을 두드리며 수다를 떠는 사랑방 같은 곳이다. 아주머니들이 빨래터에 나와있는 것을 보고 나도 호기심이 났던지 은색 세숫대야에 놓인 동생의 똥, 오줌기저귀 몇 개가 담아져 있는 것을 보고

 "저걸 내가 빨아서 엄마를 도와야지!" 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누런 빨랫비누를 대야에 담고 한쪽 옆구리에 세숫대야를 끼고 아장아장 걸어 빨래터까지 걸어 나갔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어머  재 좀 봐! 애가 빨래를 할라 하네?"라며 한 마디씩 던지셨다.

"아가~ 엄마가 시킨 거니?"

"아뇨, 엄마는 아가랑 자고요..."나는 뒷말을 얼버무리며 무슨 큰 잘못이나 한 아이처럼 물이 내려가는 아래쪽으로 자리를 잡고 조금 큰 넓적한 돌멩이를 찾아 엉덩이를 찰싹 붙이고 주저앉았다. 똥기저귀를 흐르는 시냇물에 펼쳐 물에 흔들어대니 누런 아가의 똥이 시내를 따라 흘러내려가고 기저귀를 빨래돌에 펼쳐놓고 비누를 묻히고 손으로 비비기 시작했다. 물이 생각했던 것보다 차다. 시리다. 손을 호호 입김으로 불어가며 기저귀를 비비고 돌에 치대고 하다 보니 묻어있던 똥물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신기하고 재밌었다. 완전히 하얗게 되지는 않았지만 똥색깔의 흔적은 흐르는 물속으로 떠내려갔다.

"이번엔 오줌 기저귀다~"

아까보단 조금 쉬었다. 똥색깔을 지우기가 쉽지 않았는데 오줌은 비누를 묻혀 몇 번 치대고 물에 이리저리 몇 번 하니 냄새도 오줌의 흔적도 사라졌다.


출처: '60년대의 광복 70주년 시간여행, 흐르는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주부들과 물장난하는 어린이들' [조선일보]



엎드려 한참을 비비고 나니 손이 너무 시려서 빨갛게 물이 든 것 같다. 손을 옆구리에 넣었다 빼가며 집으로 들어왔는데 엄마가 깜짝 놀라 하셨다.

 "뭐 한 거야? 빨래 빤 거야?"

엄마가 아기를 재우고 빨래하려고 나와보니 빨래바구니도 없고 나도 없고 해서 찾으러 나서려는 참이었나 보다.

"에고 손이 얼었네 어서 들어가서 아랫목에다 녹여라 동상 걸리겠다."


엄마는 안쓰러웠던지 내 손을 만져보시고 얼른 나를 방으로 밀어 넣으셨다.

"우리 딸 다 컸네~"하시며 내가 해 온 빨래를 보시고 우울물에 헹구시고 꽉 짠 다음에 햇빛에 탈탈 털어 널으셨다. 새근새근 자는 동생이불 밑에다 손을 넣어 녹였다. 엄마를 도왔다는 마음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이때부터 빨래를 좋아했다. 지금도 설거지보다는 빨래하기가 더 좋다. 빛 좋은 날 냄새나고 축축한 빨래를 널고 햇빛 냄새를 가득 품고 마르면 걷어드릴 때 공기 냄새가 빨래에서 한가득 나는 게 좋았다. 마음의 묵은 때도 같이 날아가는 것 같아 좋다.


그때는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였는지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였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 아빠는 나라 시책에 협조를 안 하시고 셋을 낳아 키우셨으니 지금 같으면 상을 줘야 할 것 같다.

여자는 마지막에 낳은 아이 때 특히 산후몸조리를 잘해야 한다고 외할머니한테 들었다. 그래야 여자 몸이 평생 차지 않고 풍이 들지 않는다고 하셨다. 여름에 낳던 겨울에 낳던 바람을 맞으면 안 된다 하셨다. 그런데 엄마는 막내를 낳고 산후조리를 잘 못하신 것 같다. 엄동설한에 바람 막아 주는 데 없는 시골에서 아이를 낳았고 아이 셋을 키워야 했기에 바람을 맞지 않을 수가 없어 몸조리를 잘 못한 것이다. 나와 오빠 때는 외할머니가 서울에서 와주셨다했는데 막내 때는 사정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엄마는 자주 발이 시리다 하시고 발뒤꿈치가 갈라져 피가 나서 아픈 발꿈치를 땅에 대지 못하고 뒤뚱뒤뚱 걸었던 것을 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바셀린을 발라드리고 밴드를 붙여드렸다. 엄마의  계곡같이 파인 뒤꿈치가 빨리 낫기를 바라면서...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다 보니 가장 어릴 때의 순간은 시냇가에서 똥기저귀를 빨던 때로 기억이 난다.


"창곡리의 그 빨래터는 없어졌겠지? 엄마!"

엄마가 계셨더라면 내 생각이 맞는지 우릴 키울 때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엄마가 계시지 않아 답답하다. 그랬더라면 엄마의 고달픈 마음을 알고 공감을 나눴을 텐데 엄마의 마음을 더 알아드리지 못해서 미안하다. 안타깝게도 엄마는 이제 옆에 안 계신다.

꿈속에서라도 만나면 엄마한테 그때 일을 물어보고 싶다.

"엄마, 힘들었지? 셋을 키울 때 말이야~"

내가 아이들 낳아 키워보니 이제야 그게 얼마나 의미 있고 숭고한 시간인지 알겠다.


엄마 보고 싶어요 사랑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전생에 나는 개였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