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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달래 Nov 24. 2023

엄마, 우리 쌤쌤이네~!

엄마가 그리 갑자기 가시니 쌤쌤이 안되잖아요~



철이 한참 지났는데도 마트에 천도 복숭아가 있었다. 나는 물렁한 것보다 딱딱해서 씨가 쏙 빠지는 식감이 좋은  천도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중학교 1학년때 일이다. 엄마랑 5일장에 나갔다가 애기 주먹만 한 천도복숭아가 나와 있는 걸 보았다.

"엄마 저거 사줘~"

"아직 맛이 안 배었을 텐데.. 너무 알이 작다"

하셨는데 나는 엄마를 졸라서 한 바구니 담겨있는 복숭아를 시장바구니에 우르르 쏟아 넣었다.

집에 오는 길에  그중 가장 실하고 큰걸 내 바지에다 쓱쓱 문질러서 먼지를 닦아내고  한 입 배어물었다.

시큼 달콤한 단물이 입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복숭아 향은 나는데 풋익은 느낌은 난다 ~ 엄마말이 맞았네 큭~"

그래도 나는 또 하나를 꺼내 아작아작 씹어먹으며 시장바구니를 흔들면서 집으로 왔다. 그런데 그리고 한두 시간 지났을까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는 거다.



"엄마 나 배 아파.."

" 어떻게 아파? 화장실 다녀와봐."

"아니 그런 배가 아니라 찢어지듯이 아파"

엄마는 걱정스러운 듯이 맹장인가 싶으셨는지 누워보라 하시고 아랫배를 살살 문질러주셨다. 엄마 손이 닿으니 조금 낫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몇 분 지나자 다시 살살 아프다.

"아까 설익은 복숭아를 먹어서 그런가?" 하시며 엄마는 찜질 주머니를 데워서 아랫배에 대주셨다. 

화장실에 다녀와봐야겠다.

그런데 팬티에 빨간 게 묻어있었다."엄마 나 피났어~."

"어~~ 우리 달래 달거리 하는구나~이제 다 컸네" 풋복숭아를 먹어서 배가 아팠던 게 아니었다.



 그때는(1977년도) 패드가 물론 있었겠지만 나는 면소재지 시골에 살아서 있는지도 몰랐다. 엄마는 위생상 광목천으로 하는 게 좋다 하시며 미리 준비해 놓은 천을 꺼내 사용법을 알려주셨다. 물론 뒤처리는 엄마 몫이었다.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그냥 벗어놓았던 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참 많은 뒤처리를 해주셨다.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엄마가 늘 삶아서 깨끗하게 준비해 놓은 광목천 기저귀를 사용하였다. 


그렇게 소녀가 대학생이 되고 결혼을 하고 두 딸을 낳고 살았다. 울 엄마는 항상 젊고 이쁘게 평생 옆에 계실 줄로만 알고 살았는데 어느새 엄마는 70세가 넘으신 할머니가 되었다. 71세 즈음에 숨을 가쁘게 쉬시며 답답하시다 하기에 심장 검사를 하니 혈관을 넓혀주어야 한다고 해서 심장에 스텐트 3개를 넣는 시술을 했다. 50세 때부터 고혈압 당뇨약을 드시고 있는 상태였고 합병증으로 심장이 약해지신 것 같다. 엄마는 이후로 병원에 꾸준히 치료도 받고 매달 약을 타다 드리고 했는데 돌아가시기 5년 전부터는 응급실에도 중환자실에도 위급할 땐 계셔야 했고 딸하나인 나는 그 모든 일들을 감수해야 했다. 병원에 한 달씩 입원을 해야 했을 때는 혼자 병실에서 자고 먹고를 같이 해야 해서 힘이 부쳤다. 그러다가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자 한평생 함께 해온 반려자를 잃은 슬픔에 기력을 잃으셨는지 그때부터 거동이 불편하시고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셨다. 


엄마 기저귀를 갈아 드릴 때마다 자존심이 센 엄마는 

"네가 고생한다~. 하시며 고개를 벽 쪽으로 돌리며 부끄러워하셨으나 엄마가 제어가 안됨을 알고 계셨기에 모든 걸 체념하시고 아가처럼 받아들이셨다.

"엄마도 나 이렇게 기저귀 갈아주고 키웠잖아~ 우리 서로 쌤쌤이네 ~?"

그렇게 웃어넘기며 생각해 보니 엄마는 20살이 다 되도록 나의 달거리 기저귀도 다 빨아 삶아주시기까지 하신 게 떠올랐다.

"엄마, 생각해 보니 나도 20년은 더 엄마를 보살펴야겠네 엄마는 생리대까지 빨아주며 그렇게 나를 키워졌잖아!~?"

딸이 그렇게 말하는걸 엄마는 "그랬나? 너 같은 딸 하나 더 낳았으면 더 좋았을 걸 그랬다. 너도 혼자서 고생 안 하고.."

엄마는 그렇게 5년 정도를 병상에서 집으로 요양병원으로 다니며 치료하시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니 '누구한테 홍시감을, 생율을 , 백도복숭아를, 가래떡을 인절미를 사다 드리지?'엄마가 좋아하시던 것들만 보면 엄마 생각이 났다. 허전한 마음에 세상이 텅 빈 것 같다.






"엄마 왜 이렇게 빨리 가셨어요? 한 20년 더 계시다가 가셨으면 엄마랑 쌤쌤이었을 텐데.. 그렇게 가시니 쌤쌤이 안되잖아요~~"

엄마랑 함께 걸었던 시골길이 떠오른다.

"꿈속에서 만나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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