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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달래 Nov 26. 2024

가을비 우산 속

첫 키스의 추억

성대결절로 음대 실기시험을 못 치르고 재수를 하게 되었던 나의 10대 후반의 일이다.

오늘같이 늦은 가을비가 추적거리는 날이었지.

이제 시험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오고 재수도 막바지 기간이다.

종합반에서 함께 공부하던 뿔테안경의 J가 있었다.

늘 까만 점퍼에 머리는 부스스 하늘로 솟아있고 꺼벙한 안경을 쓴 그 아이. 패션이라고는 전혀 무신경하고 주위에는 관심이 1도 없는 아이.

나보다 공부를 잘해서였을까 늘 그 앞자리에 앉아 책에 코를 박고 열심이었던 J.

경쟁자이기도 했지만 그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이 신경 쓰였다. 지나가다가 무슨 문제지를 풀고 있는지 들여다보게 되고 학원에 안 나오는 날은 왜 안 왔지? 하고 생각하게 되고

아마도 내가 J를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경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마음 한편에 그 아이가 들어와 있었다.

남학생들에게 관심을 받아보긴 했어도 내가 관심을 둔 아이는 첫사랑 이후 그 아이밖에 없었다. 내가 짝사랑을 했나 보다.

나보다 똑똑한 게 끌렸다.

시크해도 너무 시크한 아이다.


밤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갈 시간이다.

밖엔 늦은 가을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준비해 와서 걱정이 없었다.

J가 보던 책을 가방에 넣는 게 보였다.

'우산은 가져왔을까? '

J가 좁은 통로를 걸어 나가는 걸 보고 나는 내 검정 우산을 집어 들고 따라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J는 망설임도 없이 점퍼깃을 세우더니 그 빗길에 발을 들여놓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이런 세기의 비라면 집까지 걸어가다가 홀딱 젖을 텐데.. 감기에 걸릴 텐데..'

모성애가 발동했을까? 우산을 펴고 무작정 따라나섰다.

J는 학원가를 벗어나 대학병원 쪽으로 접어들어 가고 있었다.

비를 맞고 가는 아이가 우수에 차보여 멋있어 보였다.

"야 SBJ!!"

빗소리에 내 목소리가 개미소리같이 묻혔는지 돌아보지 않는다. 배에 힘을 주며 다시

"J!  서봐봐!"하고 외쳤다.

무슨 소리를 느꼈는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뜨악해하는 그 표정에 나는 멋쩍게 웃음이 나왔다.

성큼성큼 다가가 우산을 씌워줬다.

"쓰고 가!"




키가 180이 넘어서 나는 한 손을 치켜들어 깨금발을 집어야 했다.

J는 갑자기 달려드는 나를 보고 놀랐는지 뒤로  발짝을 물러났다.

"이 비를 그냥 맞고 가니? 이거 쓰고 가!"

한마디 말도 안 건네보았던 터라 내 행동에 놀랐겠지.

그래도 같이 재수하는 1년 동안 매일 뒷자리에 앉았던 나의 존재는 알고 있었으리라.

같이 1.2등을 다퉜으니까....


"됐어! 집 다 왔어. 너나 써"

고마운 마음은 1도 없고 귀찮다는 듯이 툭 내뱉는 아이.

"감기 걸리면 너만 손해야 쓰고 가라!"

"안 써! ........비 맞는 게 좋아..."

무심히 내뱉고는 그냥 내 성의는 전혀 관심도 없이 빗속을 걸어 들어갔다.

내 가슴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자존심에 계속 따라갈 수는 없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맘대로 해라! 감기에 걸리든지 말든지! 이 고집쟁이야!"

내 목소리는 허공에 빗소리와 함께 날아가버리고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 아이의 실루엣이 어느새 인파 속에 묻혀버렸다.

그 짧은 시간에 우산을 건네주지도 못하고 실랑이하는 와중에 나도 비를 홀딱 맞아 버렸다.

학원으로 돌아오며 나도 우산을 쓰지 않았다.

그 비를 나도 나눠서 맞아 주고 싶었다.





J는 그다음 날 나오지 않았다.

감기에 걸린 건지 다른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막바지 재수의 날들이 흘렀고 시험 하루 전날이다.

종합반 담임 선생님이 최선을 다하라는 말과 함께

"J와 달래는 낼 시험 마치고 학원에 들렸다 가라."

'무슨 일이지? 하필 그 아이와 나를 부르시는 건?'

나는 시험이 끝나도 그 아이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들떠학원으로 향했다.

'어떤 얼굴로 나올까? 그 아이는... 그날처럼 냉랭하게 또 대하면... 미소로 답해줘야지.

세상 짐 다 진 아이처럼 늘 우수에 젖어 있는 그 아이가 왠지 측은했다. 속에 뭐가 들어 웅크리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처음 말은 뭘로 시작할까? '

가슴이 뛰었다.

학원 교무실에 들어가니 선생님이 손을 올리며

"왔구나! 상담실에서 조금만 기다려! J도 와있다."

그 아이가 와 있다는 말에 쿵! 심장이  더 뛰기 시작했다.

상담실 문을 열기 전에 크게 호흡을 한번 했다.

삐걱하고 문을 여니 그 아이는 책을 들여다보며 시험에 나온 문제를 체크하는 듯 보였다.

"시험은 잘 봤어?"

내가 먼저 물었다.

"그저 그렇게.... 봤어."

코끝에 앉은 안경을 검지손가락으로 올리며 J는 겸연쩍이 말했다.

"선생님이 우릴 왜 오라고 했을까?"

나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그 아이의 표정은 시험이 끝난 직후라 그런지 조금은 풀려 느슨해 보이기도 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의 적막이 흐를 때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시험은 어땠어? 어려운 문제 있었나?"

시험에 나온 영어 문제들을 선생님이 궁금해하셔서 부르신 것 같았다.

"어떤 문제들이 나왔던가?"

시험에 나온 유형들과 문제들을 생각나는 대로 말씀드렸다.

그 아이도 내가 말이 끝나면 떠오르는 문제들을 말씀드렸다.

이번 영어 시험은 독해가 쉽지 않아서 만점은 못 맞겠다는 의견이었다.

나도 그렇고 J도 한 두 개는 틀린 것 같았다.

내가 잘하는 과목이 영어였는데 이번에도 실수는 있었다.


선생님이 수고했다며 봉투를 챙겨주셨다.

그 아이와 나는 안 받겠다고 했는데 그동안 공부하느라 수고했으니 시식코너에 가서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하시며 기어코 손에 쥐어 주셨다.

"시험도 끝나고 방학 동안에 영어회화 단과가 있다. 너희 둘 대학 가기 전에 공부해 두면 좋을 거야 꼭 나와라."

하고 덧붙이셨다.



학원에서 나오면서

"밥 먹을래? "

라고 툭 던지는 말에 이 아이가 궁금했는데 잘 되었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학원 앞을 벗어나 좀 걷다 보니 그때 시식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떡만둣국을 시켰고 그 아이는 오므라이스를 주문했다.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방학 때 뭐 할래?"

젓가락을 놓아주며 J가 말했다.

전에 우산을 뿌리치며 가던 그 표정은 아니었다.

시험에 대한 강박이 풀리니 느긋해 보였다.

"글쎄 담임선생님의 회화반 들어볼까?"

물을 따르며 내가 말했다.


"그럼 같이 듣자~"

금방 합의가 되었다.

음식이 나오고 만두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내 만두를 그에게 덜어주었다.

덤덤하게 한입에 만두를 털어 넣는 그 아이의 입이 터질 것 같이 복스럽게 보였다.


"근데 그때 왜 내 우산을 뿌리친 거니? 다음날 아팠던 거 맞지?"

궁금한 건 못 참는 나는 그에게 물었다.

"시험 때문에 다른 거 신경 쓰고 싶지 않았고 우산을 쓰고 가면 다음날 또 챙겨야 하고 절차가 싫었어."

"그래도 내 성의를 좀 봐서 쓰고 가지..."

잠시 뜸을 들리던 J가

" 시험 막바지에 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 그랬어."

툭 하고 뭔가가 떨어졌다.

그 아이는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나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공부하느라 다른데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거구나.."

J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말없이 떡을 입에 넣었다.

떡국이 몽글몽글 다 풀어져있기도 했고 입으로 들어가는지 맛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커플이 되었다.

매일 회화반에서 만나서 담임선생님의 강의를 들었고 원서를 내고 시험 발표가 있기 전까지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 만났다.

영화도 보러 가고 음악감상실에서 비발디를 듣기도 하고 가까운 저수지에 J가 좋아하는 낚시도 고 친구들 몇과 어울려 당일치기 기차여행도 갔다. 마이마이에 팝송테이프를 넣고 J가 좋아하는 스코피언즈의 할러데이를 리피트해서 들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친구들과 함께 시골에 사는 친구네로 가서 밤새 이야기도 나눴고 새벽에 해장국을 먹고 올빼미눈을 하고 헤어지기도 했다.

10대의 마지막을 J와 했다.

우리는 이제 재수생이 아니었다.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던 소속감이 없는 재수생이 아닌 자유인이었다.


그리고 J는 다시 서울 S의대에 원서를 냈는데 낙방을 했다.

나는 합격을 했다. 음대가 아닌 지방국립대.

J 가 삼수를 해야 한다.

난 대학생이 되었다.

삼수를 하는 J는 도서관에서 아침부터 공부를 했다. 이번엔 학원등록을 하지 않았다. 학원 다니는 시간이 아깝다고 집 근처 도서관에서 독학을 했다.

대학 수업을 마치고 그가 공부하는 도서관으로 매일 출근을 했다.

응원도 할 겸 같이 밥도 먹을 겸... 나의 신입생으로서의 대학 생활은 그다지 멋지지만은 않았다. 혼자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기엔 J가 걸렸다.

친구들이 권하는 미팅도 하지 않았고 남자친구가 삼수를 하고 있으니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만나면서 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부모님은 학교선생님이고  형과 누나가 있는데 형이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 정신이 이상해져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자기가 장남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누나는 M사아나운서였고 이후로 어머니도 학교를 그만두시고 집에만 계시다 하고...

그런 사연이 있어서 늘 얼굴에 그늘이 있었구나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토닥거려주고 싶긴 했다.



삼수생이 힘들어하는 한여름이 고비다. 이때 고삐를 늦추면 실패이고 정신줄 가다듬으면 성공이다.

J가 지쳐간다. 이번에 대학을 못 가면 군대에 가야 한다던데...


그날도 2학기 수강신청을 마치고 태양을 피해 양산을 쓰고 오르막에 있는 시립 도서관까지 땀을 흘리며 찾아갔다.

휴게실로 나와서 사간 김밥을 시원한 사이다와 함께 내놓았다.

"오늘은 컨디션이 어때 더운데 힘들지?"

J가 오늘따라 날씨 탓인지 더 쳐져 보였다. 그래도 힘내자고 이번엔 될 거야라고 응원했다.

묵묵히 김밥을 우걱거리며 씹던 아이의 입에서

"이제 오지 마라!"

갑자기 먹던 단무지가 목구멍에 걸렸다.

"오지 말라고? 너 보러?"

"엉... 넌 대학 다니고 나는 좀 힘들어.. 시험 볼 때까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다."

J의 마음도 이해가 가는데 앞으로 몇 달을 보지 말자하니 가슴 한편이 쓰라렸다.

"네가 많이 힘들구나.. 정말로 독하게 마음먹었구나..."

"그리고 네가 치마 입고 구두 신고 양산 쓰고 다니는 게 꼴 보기 싫다."

"더워서 양산 쓰는 것도 안돼? 그리고 원래 나는 이게 내 스타일인데.."

"그러니까 시험 볼 때까지 보지 말자."


"............알았어... 힘내서 공부해. 이번엔  잘 될 거야."

그때는 그렇게 그를 놓아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됐다.

그게 나의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한여름 김밥으로 식사를 한 자리를 끝으로 나의 어렵게 만난 짝사랑이 끝이 났다.


그 아이의 입시 시험을 치를 때까지 안 보면서 이해하려고 했으나 내가 하고 다니는 정장 차림의 옷스타일도 맘에 안 든다 하니 그가 원망이 되었다. 그럼 어떻게 맘에 들게 바꿔야 한다는 거야? 너에게 맞춰야 한다는 거야. 모두를? 나를?


'그런 좁쌀 같은 마음으로 어떻게 계속 만날 수 있어? 만나면서 트집을 잡을 게 뻔해! 너라는 아이 왜 이렇게 어려운 거니?나도 위로받고 싶고 이쁨 받고 싶다고!'



1학년 겨울 방학이 되고 나는 작은집으로 사촌 동생들의 과외를 하러 몇 달을 집을 떠나 있게 되었고 그 아이와는 연락을 거의 하지 않았다.

시험을 치른 J가 나 없는 동안 집에 몇 번 왔었다는 엄마의 말을 전해 들었을 때도 가슴은 아팠지만 선뜻 연락은 하지 않았다.


서로 갈 길이 달랐다.

결이 달랐다. J는 무채색이었다.

계속 달래주고 위로만 해주기에 나도 지쳐있었다. 프레시맨으로서 너에게 맞춰야만 했던 대학 1년도 영화관에서 나오며 기습 입맞춤을 당했던 너와의 추억도 이제는 가슴에 묻어야 했다.

같이 재수했던 학원생이 들려준 네 소식은 지방대 의대에 이번에는 하향지원을 해서 안전하게 들어갔다고 했다.

'다행이다. 군대에 안 갔구나. 이제 너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우울감을 벗어 내길 바란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 오면 그날 우산을 뿌리쳤던 그 친구가 가끔 떠오른다.


J랑 삼수생활 후 다시 만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꼬장꼬장한 성격을 내가 감당을 했을까?

더벅머리 총각은 60이 다 된 나이에 어떻게 변했을까?

좀 더 넓은 마음으로 내가 힘든 그 친구를 안아주었어야 했는데 내 생각만 했나?


비가 오는 이 가을 아침에 J가 생각 나는 걸 보니 그 친구를 좋아하긴 했나 보다.

첫 키스의 떨림도....

무작정 우산을 펼쳤던 나나 꼴 보기 싫다며 당분간 오지 말라고 했던 J나!!

너무 어렸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가 원했던 삶을 살고 있을까?

낙도에서 무료진료를 하며 살고 싶다 했는데......

어디에서든 그의 삶에 평안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J! 짜슥!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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