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사의 서막
큰 아이가 어릴적 동네 소아과에 가면 의사선생님이 안부랍시고 늘 건네는 말이 있었다.
"아유, 오월이 같은 애들은 사춘기도 안와요. 사춘기가 와도 그냥 가는 모범생 스타일이야."
희대의 망언으로 꼽히는 의사선생님의 조언은 오월이가 무려 6세때 하신 말씀으로, 본인 자녀의 연령이 중학생 즈음 되어 누구든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새였다. 6세, 아직 완성형 사람이라고 할 수 는 없는 애기 키우는 애미가 뭘 알줄 알고.
어찌되었든 의사선생님의 격려와 바램이 무색하게도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들어는 보셨는가. 중2병보다 무섭다는 초4병. 요즘은 초등학교 4학년만 되어도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것처럼 허세부리고 다녀서 초4병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출처:네이버 어학사전) 유행하는 것은 뭐가 되었든 해보고 지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 아니랄까봐 그 병에 걸리고야 말았다.
애미가 하는 말에는 일단 '싫어'와 '몰라'로 반격하는 것은 물론이요. 도끼눈은 덤이다. 방 문 쾅닫고 들어가 바람이 그랬다고 쭈뼛거리는것은 애교다. 숙제는 내일의 나에게 미룬다. 어렵사리 앉은 책상 앞에서는 모르겠다, 힘들다 돌림노래를 부른다. 궁금한 것이라곤 가스렌지 위 냄비, 오늘의 저녁메뉴이다. 준비해둔 메뉴가 맘에 들지 않는지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한숨을 쉰다. 쏟아지는 소나기라도 맞은 양 땀을 한바가지 흘렸지만 씻지도 않고 침대로 직행한다. 이런 말도 안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단전에서 부터 마라탕 매운맛이 끓어오른다. 매운맛을 단맛으로 꾸역 꾸역 눌러본다. 초콜릿을 한입 가득 물고 차라리 애미의 갱년기를 앞당기는게 낫겠다고 결론을 맺는다.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다 문득 나의 사춘기는 어땠었는지 오래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니었던 나는 누구였는지, 누군가 이런 나를 알아봐줬으면 좋겠는데 그러면서도 격하게 혼자 있고 싶었던, 복잡한데 뭐라 표현이 안 돼서 답답하기만 했던 혼란스러운 감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손톱만한 자물쇠가 채워진 비밀 일기장에 온 마음을 쏟아놨던 15살의 나는 3대가 함께 사는 집에서 자랐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께서 나와 남동생들을 돌보아 주셨었다. 그렇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할머니가 바라는 모습으로 자라왔다. 엄마 없으면 네가 엄마라는 말과 함께. K장녀로서의 책임감, 동생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 닭다리는 남동생들이 먹는거라며 양보를 강요한 희생요구따위 같은 것들이 터져 나와 '사춘기'라는 네임드를 달고 질풍노도의 파도가 몰아쳤었다.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가 그려진 일기장에는 어울리지 않게 분노와 욕설을 어지럽게 끄적였다. 어느날인가 재활용 분리수거장에서 내 일기장을 발견한 옆집 아주머니는 나를 짠한 측은지심의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셨다. 아무렴 상관 없었다. 내 주변이 돌고 있는 걸 보니, 지구의 중심이 나인가 싶다고 생각할 때였으니까.
올 여름 영화 인사이드 아웃2가 개봉하여 친구들이 극장에 간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던 오월이가 우리도 그 영화를 보러 가자고 데이트신청을 해왔다. 기회가 문을 두드려 왔는데 문고리까지 잡고 있어야 인지상정. 손가락 운동하나 자신있는 애미는 빠르게 예매를 해두었다.
영화는 사춘기를 맞은 13살 주인공 라일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의 이야기였다. 이전에 없던 '불안', '따분', '당황', '부럽'이가 라일리의 감정 컨트롤 본부(뇌)에 등장하게 되고 기존에 있던 '기쁨', '슬픔', '까칠','소심','버럭'이와 충돌하며 생기는 에피소드들을 담은 영화였다. 어른이 되고 나니, 아니 애미가 되어보니 '불안'이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겠더라. 불안이는 "내가 없으면 세상은 무질서 그 자체야!"라고 외치는 예민함 그 자체의 존재로 마치 나를 거울치료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른이 된다는게 이런 건가봐. 기쁨이 줄어드는거."
예상치 못했던 몇몇 장면들에서는 눈물이 찔끔 났다.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 감정의 폭죽이 터져버렸던 걸까.
극장을 나오며 투박한 표현너머에 담긴 오월이의 진짜 마음이 궁금해졌다. 진심으로 오월이의 진심을 이해하고 싶어졌다. 이제야 너의 불안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를 사랑하는 너의 모든 감정들을 사랑하겠다고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