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에 정석이라는 게 있다면 오월이는 지금 그 코스를 충실히 밟아가는 중이다. 머릿속이 온통 축구생각뿐인 11살 어린이.
나는 화장을글로 배웠다. 쎄씨, 키키, 신디더퍼키 잡지가 사람 하나 살렸던 시절.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전에 앞서 글로 이론을 쌓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한번 돌려보아야 마음이 놓였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더니. 오월이 역시 제대로 공을 굴려보기도 전에 책을 통해 축구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챔피언스리그 책의 오탈자와 오류 내용을 줄줄 짚어내는 이론의 달인이 될줄이야.
사실, 애미된 나는 이번주 마트의 전단행사 품목에 제철 맞은 방어회가 얼마인지, 겨울 금딸기는 세일을 좀 하는지가 궁금할 뿐이지, 지구 반대편에 사는 이름 모를 축구선수들의 풋볼 드라마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음을 고백한다.(미안하다 아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이가 관심을 확장할 수 있게 가벼운 패스나 어시스트해주는것이 전부일뿐이다.
"아들아, 나는 쌀을 씻을 테니 너는 출판사에 오탈자 메일을 보내 보아라." 이건 현대판 '한석봉과 어머니' 에피소드쯤 되려나. 며칠간 출판사의 메일을 손꼽아 기다리던 오월이는 결국 답장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TV축구 중계로 관심을 돌렸다. K리그 경기는 주로 낮시간에 열려 무리없이 시청할 수 있었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지는 프리미어리그 경기는 대부분 새벽시간대에 진행이 되고 있었다.
새벽에 잠을 뒤척이다 거실로 나오면 이글거리는 열정과 집착의 눈빛으로 축구 중계 화면을 바라보는 11살 아이가 있었다.몸은 현실속에, 마음은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 한복판에 가 있는 아이. 아, 너는 한석봉이 아니라 손흥민이 되고 싶었던 거였구나.
지구 반대편의 함성속에 누워있는 아이.
간혹 주변에서 예비 고학년 아이가 운동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것이 아니냐고 걱정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라운드를 누비며 단단해진 심장은 어떤 무대나 시험장에서도 담대할 수 있는 마음이 될 것이고, 팀 선수들과 발을 맞춰 뛰어본 경험은 원팀으로 나아가는 겸손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기필코 골을 넣고자하는 승부욕은 훗날 목표를 향해 돌진할 수 있는 무서운 투지력을 만들어 줄테니 이런걸 어디서 돈 주고 살 수 있을까.
축구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환해지는 아이가 보인다. 아이의 열정은 기꺼이 오늘 내 삶을 향한 에너지가 된다. 나는 요즘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월이를 보며 다시 배운다.
등번호 2번 내 선수
축구는 결국 둥근 축구공으로 사람이 하는 일이다. 영원한 강자가 없듯, 영원한 약자도 없다. 누구나 우승 후보일 수도 누구나 다크호스가 될 수 있다. 이런 모습이 사람 사는 세상과 닮았다. 그래서 우리는 축구를 사랑한다. <챔피언스리그 레전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