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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스포인트 Aug 30. 2022

울고 싶으면 고양이를 어루만져

안녕? 오늘부터 너의 집사가 되어줄게

부모님이 사는 집에선 털 있는 동물은 “출입 불가”였다.


만질 수 있는 동물이라곤 키워본 적 없었기에, 독립한 뒤 내게 반려동물이 생길 거란 건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내 첫 고양이 미카와의 첫 만남은 잠결에 이뤄졌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그래, 케이블 채널 송출을 담당하던 업체의 주조정실에서 일하며 3교대 근무를 하던 때였다.


야간 근무를 하는 날은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9시까지 근무를 섰던 걸로 기억한다.


20대 청춘 시절에는 밤새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고 다녔다.


당시 내 통장에 들어왔던 월급이라곤 고작 130만 원 정도.

관악구 자취방의 월세를 내고 나면 내 손에는 고작 110만 원이 남았다.

(당시에는 룸메이트가 따로 있었다.)


그걸로 각종 세금 다 내고 휴대전화 비용까지 냈으니, 저축을 할 수 있을 리가.


집에서는 난리였다.

고작 그거 벌려고 서울 올라간 거였냐고.

당장 때려치우고 내려와서 공무원 시험이나 보라고.


“난 경력 쌓아서 방송국에 입사할 거라니까!”


이런 외침은 귀를 닫은 부모님에겐 닿지도 않았다.

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지.

사회생활 초년생이라 직장에서는 탈탈 털리지.

기가 죽어 실수는 자꾸 늘어나지.


 자존감은 한없이 굴을 파고 내려갔다.

여기가 바닥인 줄 알았는데, 지하실도 있더라.

딱 이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직장에 다니면서 SBS, MBC, KBS의 공채 시험을 부지런히 보러 다녔다.


정말 아쉬운 게 있다면, 왜 늘 나는 최종에서 탈락하는 것인지.


지금도 그렇지만 방송국 엔지니어 분야는 남성을 선호하고, 여자보다 몇 배로 인원수를 많이 뽑는다.

당시에는 종편 방송국도 없었기에,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 싶으면 방송국 3사 시험에 붙는 방도밖엔 없었다.


그러다 지역 방송국 시험을 보며 전국을 돌아다니고.

또 최종 탈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매일 죽고 싶단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스터디 그룹에서 함께 공부하던 사람들은 하나둘 합격하여 나가는데. 딱 나 혼자만 남겨진 이 느낌.


[ 합격 기념으로 제가 쏠게요! 그동안 다들 수고하셨어요! ]


이 문자에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진정으로 축하해주지 못하는 나의 소심함.

그래.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야!

직장 근무 핑계를 대며 축하 자리엔 늘 빠지곤 했다.


이렇게 우울한 기분으로 가득했던 내 20대 중반.

야간 근무를 마치고 비몽사몽 한 기분으로 집으로 가는 언덕을 오를 때였다.


"야옹."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도롯가로 돌렸다.

인도에선 몇 명의 사람들이 차가 쌩쌩 다니는 도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머, 쟤 어떻게 해. 그대로 놔두면 죽을 텐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손으로 멀리서 오는 차를 막아서고는 도로에 뛰어들었더라.

그와 동시에 내 품에는 뼈밖에 없는, 아주 조그마한 털 뭉치가 안겨 있었다.


‘어? 이거 어쩌지?’


당장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약해 빠진 젖소 무늬 고양이.

내가 이 녀석을 구해 오자 구경하던 사람들은 어느샌가 사라진 상태였다.


“병원. 병원에 일단 데려가야 할 거 같은데.”


무지했던 나는 동물병원 비용이 사람 병원보다 비싸다는 걸 몰랐다.


멍하니 정신을 차려보니 이 아이의 접종 비용만 대략 5만 원을 넘어섰다.

게다가 급하게 고양이가 쓸 용품도 구매하다 보니, 더 많은 돈을 동물병원에 가져다 바치게 되었다.


내 앞가림도 못하는 애가, 무슨 동물이야.


급하게 인터넷 고양이 카페에 가입하고, 아이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데려가 달라는 글을 썼다.


하지만 이게 웬걸. 내 글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구조한 고양이는 종이 없는 코숏이었고, 어릴 때 모습도 그리 예쁘지 않았던 데다가 성격도 지랄 같았다.

당시에는 뭣도 모르고 데리고 있다 보니, 내 팔에 고양이 발톱에 할퀸 자국이 수두룩했다.

누가 멀리서 보면 자해하는 사람으로 오해를 받을 정도로 상처만 가득했다.

다행히도 나의 20대 피부 재생능력에 감사한다.

지금은 몇 개만 빼고 그 상처들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당분간만 데리고 있어야지.’가 입양 신청 제로로 인해, 결국 계속 함께하게 되었다.


그렇게 방송사 최종 면접을 보고 불합격 문자를 받았을 때.


“또 떨어졌어. 흑.”


눈물을 가득 흘리며 슬퍼할 때.


내 옆에 살을 비비며 따뜻한 온기를 나눠준 생명체는 이 못생긴 고양이 하나뿐이었다.


가족은 내 편이 아니라 날카로운 말로 상처만 주는 존재였다.


그때의 나는 고작 고양이 한 마리로 위안받고, 다시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미카엘 팽숑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을 사랑했던 나는, 내 고양이를 미카엘 팽숑이라 이름 붙여줬다.

물론 나중엔 풀네임을 부르기 힘들어 미카라고 짧게 줄여 불렀지만.


삶에 좌절만이 가득했던 그 시절.

내게 와준 고양이 미카.


힘든 20대를 지나 이제는 40대와 가까워진 나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힘들 때나 울고 싶을 때, 항상 옆에 있는 고양이를 어루만진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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