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야, 저기 역까지 누가 빨리 가는지 이 할배랑 대결 하자잉"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살던 집 뒤편에는 기찻길이 있었다. 넘어지면 코 닿을 듯한 그곳에 참 뺀질거리면서 놀았던 거 같은데, 내 기억 속 기찻길은 녹슨 선로의 빨간색, 이음새에 칠해진 꺼무접접한 구리무 냄새, 지평선까지 펼쳐진 자갈돌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만 덩그러니 가득 차 있다.
아주 오랫동안 빛바래 버려서 왜 그날 할아버지와 기찻길을 걷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민재야, 저기 역까지 누가 빨리 가는지 이 할배랑 대결 하는기야잉"라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와, 아주 신나서 흔쾌히 "응!!!!"이라고 말하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이기기 위해 그렇게 애썼지만 웃고 있던 내 웃음소리가 귓가에 퍼지고, 그런 나를 지켜보시며 웃으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날을 회상할 때마다 아른거린다.
어느 날은 자전거를 타다가 논두렁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어린놈이 네발 자전거는 어린 아이용이라며 아주 의기양양하게 보조 발을 빼버렸던 나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2미터 아래의 논두렁으로 돌진해 박혀 버렸다. 진흙을 잔뜩 머금은 채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멀리서 나를 보시곤 할아버지께서 급히 달려오셨다. 빨간 양동이, 손자가 추울까 봐 급히 데운...차가운 물, 할아버지의 거친 손, 하지만 따뜻한 당신의 모습.....그리고 "피 안 흘리네. 괘안타 울지마라"고 말씀하시던 경상도 상남자 모습까지, 기억 속 할아버지는 항상 나의 구원 투수이자 버팀목이셨다.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뵌다. 내 와이프한테 고백한 적이 있지만, 찾아뵙고 절을 올릴 때마다 산들바람이 내 몸을 감싸는 게 느껴진다. 골짜기에 위치해 있어 그냥 스쳐 지나가던 바람일 텐데도 마치 양동이에서 나를 씻기시던 할아버지의 손길 같아서 울컥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지난 5월, 나도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한참을 울다 지쳐서 잠든 내 아이에게서 커다란 왕눈이 우리 할아버지 눈두덩이가 보였다. 2개월이 돼가는 지금도 그 눈을 보고 있노라면 7년 간 삭혀왔던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떠올라 가끔 먹먹할 때가 있다.
"할아버지, 증손주 눈이 참 할아버지를 닮았십니더. 할아버지 닮아서 똑똑하겠지요. 열심히 잘 키워볼게요.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사무친다는 말을 할아버지를 통해 깨달아요. 할아버지가 주신 사랑,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도 오롯이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자랑스러운 손자가 될게요. 언젠가 다시 만나 뵐 때, 고생했다고 한 번만 안아주세요...저는 그거면 될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