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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Jun 14. 2023

이왕이면 밤나무가 되고 싶어

앙(仰) 이목구심서Ⅱ-2


산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나무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은은하게 코끝에 들어오던 향기가 점점 강해진다.

우거진 숲 안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다.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정글 속의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향기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초입에선 발이 빠지고 무릎이 잠기더니, 산 중에 드니 가슴을 채우고 목과 머리끝까지 빠져들어 숨 쉬는 게 어려워진다.

들이쉬는 코의 점막 안으로 꽃가루들이 걸쭉한 진흙뻘처럼 들이친다.

온몸의 숨구멍이 갑갑하다고 아우성이다.

머리가 아프고 혼미해져 어지러워진다.

이러다가 꽃향기에 파묻혀 헤어나지 못하고 황홀한 미망의 감옥에 갇힐 것이다.

더 버틸 수 없어 밤나무 그늘을 도망치듯 벗어나는데 땅바닥엔 가느다란 털벌레처럼 누워있는 꽃이 보인다.

역할을 다한 수꽃들이다.

다른 수꽃과 함께 세상을 호령했다가 이젠 바닥에 구부정하게 누워있다.

흡사 바닥을 기어가다 한동안 쉬고 있는 키 큰 벌레 같다.


밤나무는 암수가 따로 없이 한 몸이다.

그래서 나무는 꽃을 피우고 스스로 수정을 한다.

꽃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나뭇가지 끝에 여러 개의 수꽃이 피고 이와 함께 암꽃은 하나 정도만이 달려있다.

암꽃은 존재감이 없는 작은 꽃을 피운다.

상대적으로 크고 화려한 수꽃에 무수히 돋아난 솜털 끝에는 모기 똥만한 꽃가루가 하나씩 달려있다.

이 가루가 바람에 날려 암꽃에 닿으면 수정이 되고 여기서 아주 작은 밤송이가 태어나는 거다.


수꽃을 만지니 금빛 꽃가루가 여기저기에 묻어나 손바닥은 금세 끈적이고 서걱거린다.

이렇게 수꽃 하나에도 무수한 꽃가루를 가지고 있는데 나무 전체나 밤숲을 생각하면 꽃가루가 얼마나 많은 양이 될지 짐작할 수조차 없다.

신기하게도 나무줄기 하나에 암꽃이 하나나 둘만 있어 전체적인 밤의 수를 조절하고 있다.

스스로 건강하고 우량한 열매를 갖고자 나무는 계획적으로 절제를 택한 것이다.

사람의 윤리나 지혜라는 것이 자연을 보고 따라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된다.


꽃 하나하나의 향기는 은은하면서도 달콤하다.

그런데 꽃이 셀 수 없이 많기에 향기 또한 첩첩이 중첩되면서 의도치 않게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부족한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는 말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까.

향기가 과하여 막장에 다다른 상태가 된다.

여전히 진한 향기는 나무에서 쏟아져 나오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의 유월은 밤꽃으로 시작되었다.

집 근처 야산이나 계곡의 골짜기마다 하얀 꽃이 벙글 벙글거린다.

꽃을 제대로 보려면 나무 아래보다 산이나 언덕 등 높은 데에서 내려다보아야 한다.

나무 아래에서는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꽃은 가지 끝에 하늘을 향해 피어있어 나무 전체가 하나의 꽃다발처럼 보인다.

나무가 외따로 있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있어 산기슭은 꽃다발을 세워놓은 공연장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과수가 울 안에서 사람의 온기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밤나무는 사람의 마당을 침범하지 않는다.

산의 초입이나 야산에서 비교적 사람의 손을 덜 타며 살아간다.

관심을 주지 않아도, 주목받지 않아도 홀로 서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낳는다.


유월이 품에서 꺼내 펼쳐놓는 저녁의 두루마리는 농도 짙은 어둠이다.

저녁의 성분은 빽빽이 들어찬 향기가루.

세상은 거대한 어둠의 항아리 속에서 향기로 절여져 굴비처럼 흐느적거린다.

온종일 꿈틀거리며 쏟아지향기는 숲을 차지하고 마을까지 내려와 잠들려는 침상마저 갉아먹는다.

밤은 폐허가 되어버린 유적처럼 허물어지고 있다.

세상을 점령한 것이다.

밤꽃의 세상이다.

수꽃을 확대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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