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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Jun 11. 2023

잘 익은 살구

앙(仰) 이목구심서Ⅱ-1

시원스레 불어오는 마파람에 살구가 우수수 떨어집니다.

하나같이 때깔 좋은 살구입니다.

너무 노랗지도 않은 은은한 얼굴과 손에 쥐기에 편안한 크기여서 더 예쁩니다.

온몸이 하나의 색깔이고 속살마저 같아서 겉과 속이 동일한 친구 같은 느낌을 줍니다.


가느다란 나무줄기에 옹기종기 매달린 대여섯의 살구가 유월의 햇볕 아래 흔들리고 있습니다.

어미젖을 빠는 새끼돼지들 마냥 다닥다닥 붙어 이제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바람이 자주 훼방을 놓아보지만 살구들은 "꿀, 꿀, 꿀"거리며 더 힘껏 어미젖을 빨아댑니다.

살구들의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인지 배꼽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크게 보입니다.


그러다가 하나가 바닥에 뛰어내렸습니다.

배가 불러 더는 먹지를 못하겠거나, 이제는 젖 뗄 만큼 성장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땅엔 이미 많은 살구가 누워있습니다.

어미의 품을 떠난 이들이지만 모두가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처음부터 땅이 고향이란 걸 흙냄새를 맡으며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멋집니다.

아직 나무에 기대고 있는 익은 살구도, 바닥에 가만히 누워있는 살구도, 몇몇의 상처 난 살구도 있지만 완성된 이들만이 가지는 풍모를 후광처럼 두르고 있습니다.

이들이 바닥에 내려온 것은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열매로써 완전한 성숙을 이루어낸 이들입니다.


잘 익은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과일이든 보는 이를 흐뭇하게 합니다.

주위를 풍요롭게 합니다.

오래 곁에 있어도 편안합니다.

엷은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그 향기는 발 없이도 천 리를 간다지요.

말없이도 기쁨으로 울게 합니다.


올봄에 태어나 짧은 삶을 살다가, 익어 떨어지는 살구를 보면서

나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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