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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Jun 16. 2023

별에서 온 전기

앙(仰) 이목구심서Ⅱ-3

별에서 온 전기


소나기는 할 이야기가 많다.

먼 곳에서 찾아와 대지를 '두, 두, 두, 둑' 쉴 새 없이 두드린다.

주먹을 뾰족하게 만들어  재빠르게 찌르듯이 반복한다.

그래도 대문이 안 열리자 소나기는 기분이 상했다. 

천둥을 데려와 '버럭' 화를 내게 하고 곳곳에 벼락을 던진다.

'이래도 문을 안 열래?'


대지는 마음이 넓은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반응이 없다.

큰 입을 다물고 묵묵부답이다.

하긴 무반응도 반응의 한 방법이리라.

소낙비의 도발에 온몸이 멍들었을 텐데도 잠잠하기만 하다.

애꿎은 텃밭 고추와 가지, 들깨의 이파리가 흙탕물을 뒤집어썼다.

풀들이 상처를 입어 몸뚱이가 사선으로 기울었다.

라면 끓는 정도의 시간에 내린 소나기는 텃밭 귀퉁이에 흥건히 고였다.


"어??"

돌연 전등이 꺼졌다.

TV드라마가 처럼 새까맣다.

냉장고도 얼음땡 하는 아이처럼 멈춰 섰다.

전기밥통도, 정수기도 놀라 입을 다물었다.

눅눅하여 켜놓은 기름보일러도 눈을 감아버렸다.

한순간에 집안은 정적에 사로잡힌 빈집이 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과 묵직한 고요가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고요는 자기 자신바라보게 하는 신비한 거울을 들고 있다.

그동안 크고 작은 소음 속에서 잘도 살아왔다.

냉장고 소리, TV 소리, 환풍기 소리, 세탁기 소리, 자동차 소리, 강물 소리, 새나 곤충의 울음소리 등 일상에서  함께였다.

대부분의 소리는 자연스러워 전혀 거슬리지도 않는다.

귀는 이런 소리에 익숙해져 존재마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소리는 습관이 되었고 일상과 하나가 되었다.

내 몸의 일부였다.


그러나 지금, 소리가 사라졌다.

그 빈 공간엔 사라진 소리의 그림자들로 어둑어둑하다.

전기가 멈추고 소리가 없어지자 보였다.

곁의 소중한 것들의 부재가 한꺼번에 일어섰다.

이대로 소리를 잃는다면 나는 살아갈 수 없다.

무소음, 곧 정적은 두려움과 사이좋은 동반자다.

불안의 벌레들이 마음 밭에 우르르 모여든다.

전기가 없으면 나는 원시인이다.

사지를 다친 장애인이고, 정글의 자연에 던져진 어린아이가 된다.


소리를 잃고 전기를 생각한다.

전기를 잃고 뒤늦게 사람마저 잃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평상시엔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게 사람의 마음인가.

보이지 않는다며 잊고 다가 영영 이별한 후에나 부재를 아파하어리석음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가.


오늘 아무 일 없는 것에, 지극히 사소하여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의 연속에, 늘 곁에 있어주는 사람과 동식물에, 눈앞을 떠 받치고 있는 등 뒤의 세상에 감사하다.

"고맙다, 전기야"

"고마워, 여보"

"고맙구나, 평범함이여"


미리 준비해 둔 초나 랜턴이 없어 휴대폰을 켜고 화장실에 들어간다.

오후 네 시인데 지하동굴처럼 어두컴컴하다.

마을 전체가 정전이다.

집을 나간 전기는 어느 별로 가버린 걸까.


소나기는 그치고 어느새 햇볕이 산허리를 핥고 있다.

전등이 눈을 떴다.


힘이 센 이들은 몸이 없는 것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전기니, 바람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을 보라.

이들은 그 누구라도 넘어뜨리고 꺾을 수 있다.

진정 강한 것은 뼈가 없어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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